짙은 황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해도 나무들의 푸른 잎, 벚꽃과 목련이 화사하다. 참으로 때늦은 꽃타령이다. 기상이변으로 약간은 철늦은 봄날이다. 때늦다는 말은 인간이 약속한 시간에서 늦다는 것이지, 자연은 자연의 시간대로 피우는 싹과 꽃인데 말이다. 사흘전이 4·19혁명 45주년이었다. 4·19혁명은 자유·민주·정의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숭고한 이념과 역사적 사실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이념이 많이 퇴색한 듯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4·19혁명의 아픔은 45년이라는 질곡의 시간 속에 남아있는 가족만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서글픔이 필자만의 기우이면 다행이겠다.

자유를 찾는 갈증은 / 대지에 축축히 번져 / 참다 참다 터져 나온 울분 / 피가 뒤끓고 / 젊음은 불의에 굴하지 않았다 / 자유를 다오 / 다른 생명이 또 필요하다면 / 나도 여기 가슴을 벌리고 있노라 / 백의의 정신 불꽃처럼 뜨거워 / 넓단 길가에서 부인은 치마를 찢고 / 피흘리는 힘찬 팔뚝에 붕대를 감는다 / 죽은 듯 잠잠하던 너와 내가 / 부드러운 대지에 힘차게 서서 / 이것이 자유다 / 횃불을 들고 / 피를 태워 날은 밝았다.

웬 뜬금없는 글인가? 유창범의 `피를 태워 날은 밝았다'라는 시 전문이다. 이렇게라도 소리질러 보지 않으면 가슴 터질 것 같은 달이다.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와 대학생들의 기념마라톤 행사가 치러지는 것은 너무 형식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제 우리의 선배들이 기념행사 해 달라고 자유와 민주와 정의를 절규했던가.

자유·민주·정의, 이름만 들어도 사랑만큼이나 설레던 단어들이었는데 이제 이런 용어들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고 있다. 마치 그들만의 아끼는 말처럼 쓰면서 너무 쉽게 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4·19 정신을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우리는 역사의 해석이라는 것이 그다지 간단치 않음을 잘 안다. 그러나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국민은 가슴앓이처럼 생각하는 단어들을 너무 쉽게, 편리대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근대의 역사 속에서 조선 후기에 오면 수절, 열녀와 정려문이라는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조선 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러한 현상은 마치도 조선 후기 사회가 대단히 정절의식이 강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이러한 모습들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 일면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수습하기 위한 반증인 것이다.

인간은 사유재산(私有財産)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인다. 아마도 이론상으로 꿈꾸는 세상이면서도 실제로는 다가가기에 너무 먼 세상이 유토피아인 듯하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 속, 지갑 속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공평하게 나누어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답이 없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그 돈은 하루나 며칠을 살아가기에는 약간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액수의 돈은 아니다. 그럼에도 포기할 줄 모르는 게 우리라는 것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기가 막혀한다. 사유재산제도가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4·19의 피 끓는 선배가 있었고, 2002년 월드컵의 정열적 후배들이 있기에 우린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시냇물속의 작은 돌멩이 하나는 물의 흐름을 바꾸지 못해도, 작은 돌멩이가 모이고 모이면 물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다시금 4·19혁명을 되짚어 본다.

김상태 인천사연구소장·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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