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철기문명을 구가했던 고대 근동(近東) 히타이트 유적과 중국 쓰촨성(四川省) 양쯔강 상류 유역에 자리한 삼성퇴(三星堆) 유적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기원전 1000년을 더 거슬러올라가는 고대문명의 흔적이며, 둘째, 그 존재가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려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터키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히타이트인들에게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측면이 있다.

성경에는 '하티'라는 단 한 마디로만 남아 있던 이 히타이트는 19세기 이래 계속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 위상이 동시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왕국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이들을 능가한 왕국으로 드러났다.

히타이트 왕국은 기원전 17-12세기에 대번영을 누렸다. 다행히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문자기록을 점토판에 남겨놓았기 때문에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그 면모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기원전 20세기 무렵에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한 히타이트인들이 어디에서 온 민족이며, 또 막강한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이집트 람세스 2세를 굴복시켰던 그들의 왕국이 왜 갑자기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기원전 1274년 카데쉬라는 곳에서 무와틸리 2세가 이끄는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와 대전투를 벌였다. 히타이트 유적이 발굴되고 거기에서 이 전투 결과 두 나라가 맺은 협약을 담은 문건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역사가들은 람세스가 이 전투의 승리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람세스의 무덤에 남아 있는 글이 람세스의 승리를 전하고 있기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히타이트 유적에서 드러난 이 전투의 실상은 딴판이었다.히타이트가 대승리를 거뒀던 것이며, 이에 람세스는 굴욕적인 강화를 해야만 했다.

이는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금언이 아주 잘못된 것이며,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것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모든 기록은 그것을 남긴 자의 기념비(monument)일 뿐, 결코 실상을 전하는 기록물(document)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카데쉬 전투에 대한 이집트측 기록은 예컨대 우리의 광개토왕 비문 연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많은 이 분야 연구자가 광개토왕 비문은 고구려 당대 기록이므로 어느 기록보다도 정확하다고 여기고 있으나, 거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 곧 당대의 사실(史實)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중국 서남부 쓰촨성에 자리잡은 삼성퇴는 1986년 초가을에 시작된 고고학 발굴을 통해 알려진 고대 유적이다. 이 유적이 형성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중국 학계는 보고 있다.

이 유적은 발굴 성과가 우선 놀랍다. 각종 청동기와 옥기, 황금장식물, 도기 1천여점을 출토했는데 이중 청동신수(靑銅神獸)라는 청동기물은 높이가 3.84m나 되는데다 몸체 양측으로 수양버들 같은 가지에 과실 27개와 9마리의 신기한 새를 형상화하고 있다.

또 청동입인상(靑銅立人像)이란 다른 청동기는 높이 2.62m, 무게 180㎏에 달한다. 이밖에도 사람의 머리나 물고기 및 새를 정교하게 새긴 황금 지팡이와 황금 가면을 비롯한 각종 금제 유물도 출토했다.

삼성퇴 유적은 무엇보다 황하문명과 같은 시기에 그에 버금가면서도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이 양쯔강 유역에도 존재했음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크다.

독일 작가 비르기트 브란다우와 하르트무트 쉬케르트의 「히타이트」(중앙M&B.장혜경 옮김.351쪽.1만3천500원), 중국 고고학자 겸 작가 황젠화(黃劍華)의 「삼성퇴의 황금가면」(일빛.이해원 옮김.217쪽.1만원)은 이들 두 고대문명에 대한 소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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