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의 관심을 끄는 여러 주제 중에 방송매체를 통해 자주 듣는 용어가 ‘과거사 청산’의 문제이다. 이에 따라 동학혁명이나 일제강제동원 희생자, 그 외에도 근현대사 속에서 일어났던 각종 사건과 관련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나 명예회복위원회 등이 설칟운영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서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문의도 많고 역사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역사에서 어느 하나의 시각은 위험

역사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는 나름의 여러 가지 입장과 해석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시각으로 접근할 경우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청산이라는 의미는 과거 특정사건의 일방적 해석에 대한 ‘바로잡기’나 명예회복으로,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모든 것을 ‘청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사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검토’ 내지는 ‘재조명’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범주가 더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중에는 너무나 알려진 큰 사건 외에도 여러 가지 착종을 일으켜 잘못 인식하고 있거나, 잘못 기록된 것, 간과한 것도 많아 이러한 기회를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특히, 연대기에서 음력과 양력의 혼동이나 초기 연구자들의 기록에서 잘못 서술된 부분이 지금까지 인용되면서 계속해서 오류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인천에 있어서도 맥아더동상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자유공원의 경우, 인천인이라면 어느 정도 그 역사적 내력은 알고 있지만, 정작 1919년 한성정부수립의 대표자 회의를 열었던 장소가 자유공원(당시는 만국공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알려져 있다시피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민족운동 세력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곳이 7군데나 되었지만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논의를 거쳐 단일한 임시정부로 수렴됐다.

이 가운데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항 중의 하나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회의’라 할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3월 초 이교헌·윤이병·윤용주·최현구·이용규·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계의 대표들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회의 참석자는 천도교, 기독교, 유교, 불교대표 등 20명이었고, 뒤이어 4월 중순에는 13도 대표가 서울 서린동 봉춘관(逢春館)에 모여 협의하고, 4월 23일 봉춘관에 ‘국민대회’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2호를 발표했던 것이다. 한성정부의 수립사실이 '연합통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내·외에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로 부각되었고,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했다. 한성정부는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되고, 정부조직과 각료구성에 있어 해외지도자를 총망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자유공원의 역사 재검토 필요

이렇게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것은 개항 이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축적돼 온 인천지역 민족운동의 열기와 역량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공원의 창조적 복원사업이나 도시재생사업 등의 과제를 수행해야 할 인천지역사에서도 아직 초기연구의 심화를 기다리는 역사적 사실들이 산재해 있는 지금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의 재검토’, ‘과거사의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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