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대비하는 역사교육은 진실의 규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제가 예상되는 문제의 배경과 진행과정, 연대기, 사건의 의의 등에 대한 정형화된 해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가능한 짧은 시간 내에 지나간 역사적 사실들을 암기·이해하려다 보니 교육자나 피교육자 모두 그 방법상에 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식하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역사의 가치를  ‘필요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중요치 않은…’ 정도로 생각하는 오만한 인식도 있기는 하다.

           개혁과 혁명은 궤를 달리한다

근자에 있어서 우리사회의 화두는 개혁이다. 개혁은 '정치체제나 사회제도 등을 합법적·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 나가는 것'으로, 기존의 체제나 추세와 조화를 이루고 사회제도 및 정치체제 등의 본질적인 요소는 유지하면서, 사회 발전에 적합하도록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개혁은 기존의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기존체제의 붕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사회제도나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시키는 ‘혁명’과는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은 현재에서만의 화두는 아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안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 보수와 진보와의 대립, 종족간의 암투 등은 마치 ‘적과의 동침’과도 같은 숙명적 관계였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사건으로 전개됐다.

우리의 역사에는 역성혁명이나 동학혁명처럼 성공과 실패가 적시된 사례도 있으나, 개혁과 관련해서는 시련과 좌절의 역사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서는 개혁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한 사례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비롯해 신돈, 조광조, 정조, 대원군 등과 같이 그 성패여부에 따라 역사의 한 장면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던 사례를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쇠잔해 가던 몽고의 원나라와 신흥의 명나라가 등장하던 격변기에 고려의 군주인 공민왕과 신돈은 반원정책을 개혁의 기치로 내세웠지만 기득권을 쥔 권문세족에 의해 좌절되었고, 심지어는 공민왕의 피살로 이어지게 됐다. 조선후기 문예진흥기의 군주인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는 다른 개념의 탕평책을 추구해 기존 정치권에서에서의 인재등용보다도 재야의 능력있는 인재를 발탁, 국정을 운영하려 했으나 그 역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조선전기 새 시대의 진보를 내세우며 군주인 중종의 신임받던 조광조는 부패한 훈구와 척신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현량과를 설치하고, 신진의 사림을 등용해 국정을 쇄신하려 했지만 결국 중종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사약을 받기에 이르렀다.

19C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려 전국적으로 민란과 백성들의 봉기가 잇따르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 강제개항을 당하던 시기에 어린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조선의 국운을 걸고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지만 급변하는 시대추세 속에서 그 역시도 ‘그저 그런’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군주이면서 또는 군주의 권한을 위임받았거나 군주의 아버지로서 한 시기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리고 모두가 새 시대가 지향하는 개혁을 단행코자 했지만, 그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개혁의 실패라는 오명을 남겼다. 전근대 봉건제 사회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음직 한 데도, 당대의 군주나 최고 통치자들에 의해 주도된 개혁이 좌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개혁의 완성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인가?

                   개혁은 역사상 영원한 화두

역사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면, 역사가 반복적으로 순환되어 연출되는 것이라 한다면, ‘개혁’은 우리 역사에 있어 영원히 지속적으로 대두되는 화두일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가 성공적 개혁이듯이, 지나간 역사속에서 개혁의 실체를 간과해 버렸거나 무의미하게 받아들인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역사는 미래를 기약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고, 개혁은 역사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올 한 해 건강한 역사가 살아 숨쉬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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