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구조조정본부 폐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본격화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측은 대기업 구조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이며 폐지를 유도할 의향을 비쳤고 재계는 즉각 반대 의사를 밝혔다. 구조본 문제를 계기로 상속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 전환,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도 도입 등 재벌 정책 전반이 본격적인 논란거리로 떠오르며 인수위와 재계, 야당 간에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다.재벌정책이 새 정권 출범 전에 당장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만큼 시급한 사안인가. 서민 경제 문제보다 재벌정책이 더 우선적으로 풀어야할 현안일까?

현 정부는 며칠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언급한 바 있는 이른바 5+3원칙에 따라 재벌 그룹 경영의 투명성 제고, 재무구조 개선, 변칙 상속.증여 방지 등을 추진해왔다.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엇갈릴 수밖에 없는 만큼 논외로 하더라도 재벌 그룹의 구조조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재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의가 없을 것이다.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비춰 보아서도 재벌의 구조조정은 지속돼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작업은 경제정의 구현과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대명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정부가 어떤 형태의 압력을 가해 진행시키든, 재벌 기업 스스로 알아서 하든 궁극적인 목표는 시장경제의 틀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국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우리 경제 상황이 그렇게 하기 위한(재벌의 바람직한 구조조정을 위한) 조건이 충족돼있는 상태일까.

경제분야에서, 김영삼 정부가 김대중 정부에게 넘겨준 가장 큰 짐이 환란이었다면 김대중 정부가 노무현 정부에게 넘겨줄 가장 큰 짐은 260만명에 이르는 신용불량자와 430조원에 이르는 가계 빚 문제가 될 것이다. 공적자금 상환 부담을 포함한 적자재정도 적지 않은 짐이다. 뭉뚱그려 말하면, 환란 전의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실이 몇 년 사이 가계와 국가 재정으로 전가된 셈이다. 새 정부는 지금부터 모든 역량을 기울여 부실 가계와 적자 재정 치유에 매달려야 한다. 적자 재정은 정부 자체의 문제라고 치더라도 신용불량자와 부실 가계 문제는 많은 국민이 고통 받는 문제이니 만큼 당장 정부와 온 국민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시급한 문제다. 재벌정책을 포함한 개혁에 앞서 선결해야할 최우선 과제라는 얘기다.

결코 재벌 개혁을 늦추자는 주장이 아니다. 지난 2년여 재벌 개혁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일관되게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는 쪽에 서왔고 지금도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음을 밝힌다. 단지 수백만 명의 국민이 매일 매일을 암담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먼저 눈을 돌리자는 말이다. 인수위 관계자의 재벌정책 발언이 어떤 비중을 갖고 나왔는지, 또 그 발언이 각 언론에 의해 왜 급속히 확산됐는지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앞으로는 정책의 우선 순위, 논란의 우선 순위가 신용불량 상태인 `내 가족, 내 이웃'에게 모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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