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유럽 몇 나라를 방문하던 중에 인간 역사상 유래가 없던 아우슈비츠의 인간 도살장 수용소에 간적이 있었다. 폴란드 남부에 있는 이 수용소는 1940년 6월에 나치 친위대원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세운 것이다.

괴링이 유태인 멸절을 제안한 이래, 1천100만 명의 유럽거주 유태인 중 약 600만 명이 5~6개소의 대수용소에서 희생됐는데, 이곳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만도 1945년 1월까지 폴란드인, 러시아인, 집시, 전 유럽의 유태인 등 400만 명 가까이가 끔찍하게 살해됐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기차로 수송돼 오면 먼저 건강한 사람들과 노약자로 분류돼 건강한 사람들은 노역장으로 보내지고, 노약자들은 가스실로 끌려가 죽었다고 한다. 가스실은 샤워장처럼 꾸며 놓았는데 샤워해야 한다고 속여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그들을 죽인 독가스는 지클론이라는 것이다. 나치들은 유태인들이 실려오면 2천여 명씩 구덩이에 던져 넣고 메탄올을 뿌려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끔찍했던 상황들이 느껴졌지만 특히 재사용을 위해 머리카락, 안경, 의족, 가방, 구두 등의 신발류, 옷가지, 그릇, 머리빗, 숟가락, 구두솔, 칫솔 등을 엄청나게 따로 모아 놓은 방들을 보니 몰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 모아 놓은 것만도 7t이라니 나머지들도 상상이 간다. 금니를 녹여 금을 뽑았고, 머리털로 천을 짜기도 했다고 한다.

지하에서는 병든 사람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가스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맥시밀리안 꼴베 신부가 대신 죽었다고 해 1981년 성인으로 추대됐다고 한다. 그 높은 신앙의 경지에 숙연해 진다.

이 수용소에서 가장 잔인한 방으로 알려진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유태인을 단종시키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생체실험을 했다고 한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들이다.
  이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젊은이가 이렇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여기 끌려올 만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런 불평을 듣고 있던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가 그렇게 아무 일도 안 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걸세.” 과연 옳은 말이 아닌가! 민족과 국가를 지키려는 옹골찬 노력이 없다면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아우슈비츠에서 참담한 나날을 보내다가 겨우 살아난 어떤 이가 '선생님들에게'라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절규하듯 썼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나의 눈은 아무도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가스실은 학식있는 엔지니어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어린이들은 교육받은 의사들에 의해 독살되었습니다. 유아들은 훈련받은 간호사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총살당하고 불태워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육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당신의 학생들이 인간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당신의 노력이 결코 학식있는 괴물, 숙련된 정신병자, 교육받은 살인마 아이히만을 길러내서는 안됩니다. 읽기, 쓰기, 셈하기는 오직 그것이 우리의 아이들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할 때에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교육을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교육이 순기능적으로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과거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고 있음에도 역기능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한 동네에서 몇 번씩이나 마주쳤을 ‘아저씨’에게 성추행과 살인을 당한 한 소녀의 죽음으로 온 국민이 망연자실했다. 그 아들까지 아버지의 행각을 거들었다는 것이 사건의 엽기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더 이상 불행한 소녀와 그의 가족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각계에서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유사한 성폭행사건이 이어지고 있다는 보도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전자팔찌를 채우고, 집주소를 공개하고, 주홍글씨를 새기듯 문패에 성범죄자라는 걸 새겨서 알리겠다는 등 대책은 다양하다. 가해자에 대한 응징의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첨단기법, 글로벌기법이 총동원되고 있는 것이 요즈음 상황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온 나라가 나서는 총체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웅변한다. 관계 부처에서는 연일 타 부처보다 더 강력한 엄벌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가해자에게 ‘생지옥’을 만들어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일까?

급기야 교사들에게 사법단속권을 부여한다는 시책까지 등장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런 시책이 제시됐겠느냐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시책이 우리들의 마음을 안타깝고 우울하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어떤 사람이 부르짓은 인간교육의 절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사가 존경 받는 위치에서 공교육의 신뢰를 높이고, 가정교육의 기능이 바로 서고, 사회적 지도층이 권위를 회복해 사회교육의 건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우리교육이 제자리를 찾아 본질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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