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 주변 허름한 판잣집들이 헐리고 그곳에 새 아파트와 작은 공원, 그리고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자리잡은 지 서 너 달이 지났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어디에나 있었던 달동네를 테마로 삼았다는 점과 재개발이 된 바로 그곳에 살던 서민들의 생활상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이 박물관에는 요즘도 관람객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어느 민간단체의 아이디어를 구청에서 받아 시작한 점이나, 전시될 생활가구나 자료들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증하는 등 참여했던 건립과정이나, 과거 관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모습과는 달리 보다 진전된 민주사회의 사업추진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서 이는 민초들의 평범한 삶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과 더불어 ‘생활사박물관으로서의 달동네박물관’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달빛 아래 애증과 온정을 반추

달동네를 사실적으로 축약해 만든 달동네박물관이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사실 지지리도 못살던 것을 그리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달동네를 떠올리면 애잔함이 함께 하는 것은 단지 지나간 것에 대한 추억과 향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보고 싶고 또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달이 이 세상 어디 비추지 않는 곳이 있으랴. 그 시절 달동네엔 달빛 아래 생명이면 다 있는 그런 애증들이, 이웃 간의 온정이 있었고, 달동네박물관은 그것을 반추하고 있다.

수도국산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인천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면서라는데, 그 후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과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부두노무자들이나 막일꾼들, 피난민들, 그리고 공장 일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달동네를 이루었다 한다.

가파른 산비탈의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판잣집들. 한 집에도 몇 가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달동네. 구차하고 가난했지만, 그 때의 그곳엔 고난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희망이 있었고, 서로를 생각하고 보듬어주는 자기희생적인 사랑도 있었다. 핍박함 속에서도 긍지를 잃지 않으며 공동체를 존재하게 하는 힘,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룩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힘, 달동네에는 그것이 있었다.

돌이켜보자면 지난 한 세기, 우리 대부분은 달동네에서 살았다. 이 비탈에 살던 주인공들 중 누구는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부평 미군부대 앞을 서성댔기도 했고, 누구는 먼지가 뿌연 주안과 부평의 공장으로, 또 누구는 용병으로서 월남에 갔다. 독일로 간 광부들과 간호원들의 송금으로 집안이 일어나기도 했고, 중동 사막으로 건너간 건설 노무자들의 땀으로 제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5천년 역사에서 지난 한 세기, 우린 막다른 골목에서 되살아나는 달동네의 시기를 건너왔다.

단지 추억이라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달동네는 막장으로 내몰린 자들이 마치 용광로 속에서처럼 다시 제 삶을 정화하는 곳이었으며, 그런 이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며, 나름대로의 연대감과 사랑으로 인간 존엄성이 최후의 보루처럼 지켜지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 인간으로 대우하고, 대우받고 살았다. 비록 그들끼리라도 바깥의 한기로부터 서로를 녹여주고 지켜주는 인간적 훈기가 그곳엔 있었고, 그래서 그곳은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덥혀주는 대기소였다.

              인간가치 재해석, 재창조가 과제

떨어졌다 다시 피는 무수한 개나리들.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꽃들에게 공통적으로 생명의 본질이 있듯, 수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역사가 생활사박물관에는 있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족적을 기록한 달동네박물관은 인간 생명이 본래 갖고 있는 가치들, 태초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삶의 가치들과 인간적인 가치들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재해석해 우리의 정신으로 재창조해 나갈지가 달동네박물관과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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