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둔치를 걸어보자. 콘크리트 호안 너머 강물이 넘실대지만 발 옮길 적마다 먼지가 풀썩인다. 분명히 강변이지만 개구리 한 마리 없는 사막이다. 오랜 세월 굽이쳐 흐르며 온갖 생물이 어우러졌던 강줄기를 불도저로 가로막고 포클레인으로 파고 콘크리트로 마감하며 직선으로 획일화하자 나타난 저주의 현상이다. 그래도 유람선은 오간다.

홍수가 날 적마다 중계 카메라가 몰리는 중랑천을 보자. 이맘때 민망할 지경으로 물이 말랐고 오염된 바닥은 코를 쥐게 한다. 겨우내 물이 얼었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강변의 공장과 아파트는 물론 강둑의 도로도 없이 생기 넘쳤을 텐데, 직선으로 좁히고 유역을 매립해 분양하자, 역사와 문화를 안고 흘렸을 중랑천은 홍수 나면 넘치고 비 없으면 마르는 한낱 도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도랑은 작은 비도 감당 못하고, 빗물 뒤에 오물만 남긴다. 중랑천을 비롯한 우리 땅 곳곳에 직선화된 강들이 다 그 지경이다. 때를 기다리다 한꺼번에 내버리는 공장의 폐기물까지 포함된 오물이 물살이 잠잠해진 바닥에 켜켜이 내려앉는 우리의 강들은 홍수와 가뭄에 유난히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유엔이 정한 물 부족 국가이고 앞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마실 물도 구하지 못할 것이므로 댐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거품을 무는 이들이 있다. 댐을 지어야 먹고사는 조직과 대개 무관하지 않다. 과연 어떨까. 작년 국정감사에서 자료 부풀리기로 댐의 필요성을 과대 산정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댐은 식수를 언제까지 해결해줄까. 집중호우가 노도와 같이 댐에 흘러들어 바닥에 오물을 가라앉힌 이후의 대책은 무엇일까.

다행스럽게 과대 산정돼 예정한 댐 계획이 수정될 예정이라고 한다. 무모한 지방행정으로 아름다운 윤선도의 역사와 문화가 수장될 뻔했던 보길도는 단식에 들어간 한 시인을 포함한 주민들의 반대운동으로 댐 계획이 저지되기도 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움이 없는 세상은 누구나 상상하기 싫을 것이다. 시인의 아름다운 분노는 주민들의 심연을 일깨웠지만, 다분히 의도적이었을 댐 건설에 제동이 걸렸건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왜일까.

보길도 댐을 주장한 완도군수는 물 공급 확대로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우리는 돈과 소비에 얽매인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관광객 유치나 개발로 잘 살 수 있다는 인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자연 그대로 아름답던 시절, 주민들은 지금보다 가난하고 불행했을까. 그릇도 반찬도 옷도 집도 읍내도 단출했던 시절, 물 소비가 많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몸과 마음은 더 깨끗했는데.

누군가 물 전쟁을 경고한다. 물 분쟁은 지역을 넘어 국가 단위까지 증폭될 것을 우려하는데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나. 댐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환경단체는 녹색댐을 주장한다. 상류의 숲을 자연스럽게 보전하거나 나무를 많이 심어 산의 보습력을 높이자는 발상, 즉 댐 없이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게 하자는 제안이다. 또한 빗물을 포함한 물의 재사용을 촉구한다. 정화처리한 물을 버리지 말고 허드렛물로 재사용하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물 소비를 줄이는 일일 것이다.

거대한 세탁기를 한없이 만족시키는 의복 가짓수를 대폭 줄이고, 물 소비가 많은 식습관을 고쳐나가면 어떨까. 남겨도 다시 끓여 먹을 수 있는 찌개를 줄이자는 뜻이 아니다. 사육에서 도축, 포장, 폐기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물 소비를 요구하는 육가공이나 낙농제품을 덜 먹자는 부탁이다. 그러면 물 소비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요는 소비자의 각성을 발판으로 공급을 줄이자는 뜻인데, 댐 더 지어 인건비 챙기는 건설 관련 세력이 얼마나 귀담아들을지. 3월 22일은 ‘물의 날’이었다. 물의 날을 맞아 관제 행사를 열 일이 아니다. 늦기 전에, 후손의 갈증을 염려하고, 이제까지 일관된 낭비적 삶을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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