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는 `예술은 사기'라는 말로 큰 파문을 던진 일이 있다. 어떤 맥락에서 그같이 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각에서는 진실성이 사라진 현실 예술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기도 한다.
 
`예술은 사기'라는 말을 들고 나온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다. 이번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프랑스 젊은 작가 마르탱 파주(31). 그는 최근 번역 소개된 장편소설 `빨간머리 피오'를 통해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현실 예술계를 통렬히 비판했다.
 
주인공은 사기 행각을 벌이며 생계를 이어가는 스물 두 살 고아 여성 피오. 그는 `우리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돈을 지불 할 수 있는 일주일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명 인사들에게 보낸 뒤 돈을 가로채는 일을 하고 있다.  협박에 걸려든 사람들이 돈을 놓고 가는 장소인 뷔트 쇼몽 공원에서 화가 행세를 하며 주기적으로 돈을 수거해가곤 하는 피오. 그러던 어느 날 앙브로즈 아베르콩브리라는 특이한 `손님'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예술 비평의 권위자인 아베르콩브리 역시 피오의 협박을 받고 돈을 전달하기 위해 공원에 나온 인물. 우연히 피오의 사기 행각을 눈치챈 그는 화를 내기는 커녕 피오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그의 사기극을 예술로까지 평가한다. 그리고 이날의 사기극을 위해 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
 
4년이 지난 어느 날 약속은 현실이 됐다. 아베르콩브리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베르콩브리의 대리인을 자처한 남자가 피오를 찾아와 피오야말로 아베르콩브리가 살아 생전 인정한 천재라고 일러준다. 피오의 후견인을 자처한 그는 곧 예술계에 화려한 천재 화가의 등장을 알린다.
 
하루 아침에 `천재예술가'로 변신한 피오. 그러나 하루하루가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피오의 눈에 비친 예술계는 끔찍하리 만큼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예술계에서 피오의 천재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앙브로즈가 인정했다는 것만 중요할 뿐. 난해한 것을 언어로 포장해 내는 기술을 가졌을 뿐인 유명한 전위 예술가, 피오에 대해 거짓 기사를 써대는 예술 비평가. 심지어 피오의 작품을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거나 극찬한다. 
 
소설은 피오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는 밀라노 전시회장에서 밖으로 뛰쳐나가 결국 센강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특히 작가는 피오의 부모가 한 때 서로 총구를 겨눴던 범죄자와 경찰 사이였다는 점, 피오가 그린 몽타주로 인해 부모가 경찰에 체포된다는 점, 사기 행각이 주인공을 성공의 세계로 이끄는 기회가 되는 점 등 일련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세상의 부조리를 시원하게 꼬집는다.
 
한정주 옮김. 274쪽. 9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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