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관문인 인천항에는 출·입항 선박들의 안전운항을 위한 길잡이 역할로 불을 밝히는 등표 부표와 유·무인도 등대 등이 무수히 많다. 이 가운데는 등대역사 100년이 넘은 팔미도등대와 다양한 문화 혜택에서 고립된 무인도 등대 등 여러 등대가 있다. 이들 등대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한국 등대역사 100년의 증인, 팔미도등대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 떨어진 작은 섬. 사주(沙洲)에 의해 연결된 두개의 섬이 마치 여덟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라 불려지는 이 섬에 등대가 설치된 지 100년을 넘어섰다.

인천항 항로 진입 길목에 자리잡은 팔미도등대는 6·25전쟁을 반전시키는 데 기여한 일화를 안고 있다. 당시 UN군은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에 기대를 걸었으나 심한 조수간만의 차 등 악조건을 극복하는 데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9월14일 밤 10만 병력과 수백 척의 함대가 무사히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팔미도등대가 그 길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팔미도등대는 우리 민족과 함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1901년 개항되던 해 일본은 우리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通商章程)’의 “한국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라는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강권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는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등대 건설에 들어간 지 1년1개월만인 1903년 6월 높이 7.9m, 지름 2m의 팔미도등대를 만들었다. 그후 이 등대는 지난 100년간 그 불빛을 비쳐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팔미도등대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됐다. 해양부는 팔미도등대를 첨단화하기 위해 2002년 9월 총사업비 36억 원을 들여 높이 31m의 등탑과 전망대 그리고 팔미도등대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조형물 `천년의 빛' 건설에 착수해 지난해 말 설치를 완료했다.
 
예전의 등대는 `100주년 기념등대'가 점등하던 지난해 12월22일 퇴역해 현재 인천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지난 100년간 불빛을 밝혀온 그 자리를 지키며 영구 보존될 계획이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역사와 6·25전쟁시 인천상륙작전을 지켜보며 100년을 보낸 팔미도의 새로운 등대가 앞으로 우리나라가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로 발돋움하는 불빛이 돼 주기를 기대해 본다.

 ▶인천항의 관문에 위치한 최첨단 부도등대

등대는 선박들이 쉽게 관측할 수 있는 해상항로의 주요 요소요소에 설치된다. 따라서 등대의 입지적 환경은 등대원들의 근무여건이나 교통보다는 선박들의 안전이 최우선적인 요인이 된다. 그러다보니 많은 등대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서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등대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와 멀리 지나가는 선박, 그리고 벗이라고는 언제나 뭍으로 향하는 파도와 바다를 지키고 있는 외로운 갈매기들뿐이다.

부도등대가 있는 섬은 무인도로서 행정구역상으로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하는 조그마한 섬(5천280평)으로 인천항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약 47km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육지와 연결하는 여객선 등 대중교통 수단은 물론 없다.

이곳은 흡사 물오리가 두둥실 떠 오수를 즐기는 듯 보인다 해 부도(鳧島)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도깨비가 많다고 해 도깨비 섬이라고도 하며, 많은 도깨비를 쫓기 위해 도깨비가 제일 싫어하는 피(血)와 소금(鹽)을 섞는다는 의미로 피염도라고도 불리운다.

부도는 인천항을 출입하는 선박항로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인천항의 진입항로는 긴 협수로이며,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강해 해상교통 환경이 열악함에 따라 다른 지역보다 먼저 이곳 부도에 등대가 설치됐다.

지난 1903년 6월1일 우리나라 최초로 등불을 밝힌 팔미도와 소월미도, 북장자서 등대, 그리고 백암등표에 이어 1906년 4월부터 불을 밝혀온 부도등대는 올해로 100년을 맞는다.

선박의 길잡이로서 우리민족과 고락을 같이 하며 수많은 영욕의 한 세기를 감내해 온 것이다.

부도등대는 그 위치의 중요성에 걸맞게 항로표지의 주요 기능인 광파표지, 전파표지, 음파표지를 모두 갖춘 등대이기도 하다. 이 등대의 등탑은 높이 15.2m, 지름 3m 규모로 불빛은 15초마다 한 번 반짝인다.

작년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프리즘 렌즈를 이용한 회전식 대형 등명기를 설치해 약 50km의 먼 곳에 있는 선박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도록 광력을 증강했다.

아울러 금명간 선박운항에 영향을 주는 조류의 방향과 속력을 측정할 수 있는 조류신호시스템이 설치된다. 지금까지 등대가 수행해온 선박의 안내자 역할에서 벗어나 주변수역의 다양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구기관, 대형 유조선 및 가스운반선 등 위험물 운송선박에게 제공함으로써 등대가 위치한 해상을 항행하는 선박들의 안전운항의 길잡이가 됨은 물론 해양조사·연구와 항만설계 등 기초 자료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로써 부도등대는 무인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IT시대를 선도하는 미래 지향형 첨단등대로서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안전운항을 위해 앞으로도 밤낮없이 거친 바다를 지켜나갈 것이다.

▶중국과 북한 항로를 지키는 소청도등대

지난 1908년 설치되어 98년째 우리나라의 서해바다를 지키는 소청도등대.

소청도는 인천에서 서북방 210km거리에 위치한 대청면에 속해 있는 섬으로 조선 명조 이전까지는 본래 소암도라 칭해왔다. 완만한 섬의 형태가 남북으로 길게 널려 있고 해안선을 따라 기암괴석과 바다낚시가 모두 가능한 지역으로 한적하게 여름을 나기에는 두말한 나위 없는 곳이다.

순박한 주민들의 두 개마을(예동, 노화동)에 나뉘어 살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로서 섬 전체가 갯낚시로 우럭, 놀래미, 가자미 등의 어종이 많이 난다.

소청도의 서쪽 끝 83m 고지에 우뚝 서 있는 소청도등대는 서북해 일대와 중국 산둥(山東)반도, 만주 다렌(大連)지방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에 바다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시대를 거쳐 8·15광복 후 오늘날까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해상휴전선에 등불을 밝히며 남북한 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등대인 것이다.

소청도 주변 일대는 밤마다 점멸하는 등대 불빛따라 흐르는 풍경들로 외국의 여느 휴양지 못지 않은 낭만을 즐길 수 있어서인지 여름 휴가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소청도에는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마치 분칠을 해놓은 듯하다 해서 유래됐다는 `분바위'가 유명하다. '분바위'는 달빛이 하얗게 띠를 두른 듯하다 해서 `월띠'라고도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믐밤 바다에서 동네 앞으로 들어오는 배들의 방향 잡이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장엄하고 웅장하게 펼쳐진 `분바위'는 신이 빚은 하나의 걸작품이라 할 만큼 그 절경을 자랑한다. 이 `분바위'는 원나라 태자인 `순제'가 쉬어 가던 곳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분바위'에는 굴이 안으로 약 50m 가량 뚫려있는데 무엇에 이용되었던 굴이었는지는 전해 내려오는 게 없다고 한다.

소청도는 인천 연안여객부두에서 초쾌속선(데모크라시호, 페가서스호, 아일랜드호)을 타고 3시간30분 동안 가면 답동 선착장에 도착하고 여객선은 하루에 3회 운항된다.

가장 오래된 등대지기 - 인천지방해양수산청 기능6급 오준익(58)씨

"인천항을 출입하는 선박들이 등대를 보고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것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 많은 긍지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오늘도 묵묵히 소청도등대를 지키며 선박 입·출항을 바라보고 있는 등대지기 오준익(58)씨.

오 씨는 지난 77년 12월 인천지방항만관리청 등대원으로 임용된 후 관내 유인등대를 두루 거친 후 현재 소청도등대에 이르기까지 29년 동안 무인도서 등에서 숱한 어려움 속에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을 갖고 수도권 갑문인 인천항 입·출항 선박의 안전운항을 지키고 있는 가장 오래된 등대지기이다.

그는 "사회로부터 고립돼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오직 등댓불을 밝혀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묵묵히 일 해 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 씨에 대한 칭송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지난 1986년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열악한 조건의 무인도인 목덕도에서 근무할 당시 생활용수로는 오로지 빗물만을 사용하고 물을 제한급수하는 등 어려움이 뒤따라도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경사진 비탈길 500m를 지게를 이용해 유류 등 표지용품을 운반하는 등 등대 기능유지에만 골몰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오 씨는 지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동안 해상 여건이 복잡하고 교통편이 없고 작은 바위섬인 무인도서 부도등대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부식조달이 어렵자 등대 부근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개간, 농작물을 재배하고 해송을 비롯한 묘목을 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등대기능유지 및 운영을 위한 그의 헌신적인 등대사랑의 결과이다.
 
현재 우리나라 서북단 소청도등대에서 선박안전운항을 위해 애쓰고 있는 그는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오늘도 망망대해에서 외로움과 수심에 잠긴 후배 직원들을 격려해 가며 묵묵히 등대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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