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 행궁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지난 1997년 12월 4일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창덕궁과 더불어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및 판전, 종묘 등에 이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문화유산은 세계문화유산협약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 가입국의 문화유산 중에서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돼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유산을 말한다.

 화성은 207년 전 조선 정조시대의 국가적 역량이 집약돼 축성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화성 내·외부의 미복원 시설물을 원형복원(화성성역의궤)해 문화재로서의 가치 증진은 물론, 세계 최초로 계획된 신도시 화성을 수복 정비해 역사도시로서의 자긍심 회복과 세계인들로 하여금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창룡문
 정조는 1793년 1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며,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했다. 정조는 부(富)·수(壽)·다남자(多男子)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긴 중국의 화봉삼축(華奉三祝)의 고사를 인용하며, 수원의 지명을 `화성'으로 개명하고 도시기반시설을 정비했다.

 화성축성에는 축성을 지휘하는 국왕 정조로부터 축성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군민일치를 통한 민본주의의 이념이 실현됐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을 떠나 역대 선대왕의 능원(陵園)이나 건강을 위해 온천을 찾아갔을 때, 혹은 전란으로 피신했을 때 머물기 위해 세워진 임시 거처를 말한다.

 `화성행궁'은 수원에 있는 행궁으로, 행궁의 건립은 수원부 관아의 역할도 포함돼 있지만 사실상 정조를 위한 궁이기도 하다.

 1789년 정조는 생부인 장헌세자(원래 이름은 사도세자)의 영우원(永佑園)을 당시 수원부로 옮기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야 억울하게 돌아가신 장헌세자의 묘소를 천하의 길지에 묻어줘 그의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의 이 같은 마음도 사실이지만 정조가 군왕으로서 강력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유도 상당히 많이 작용했다.

최승필 기자 spc@kihoilbo.co.kr

 ◇화성의 시설
 화성 성곽에는 오방색에 맞춰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이 구분에 따라 관리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나눴다. 깃발의 색이 바뀌는 지점에는 경계석이 있다. 화성 성곽에 꽂혀 있는 깃발의 색깔에 따라 본 책의 `화성의 시설'에도 위쪽에 색깔띠를 둘러 구분해 알아보기 쉽도록 했다. 오방색은 음양오행의 오행을 색으로 나타낸 것으로 목은 청, 금은 백, 화는 적, 수는 흑, 토는 황에 해당된다. 이는 각각 동, 서, 남, 북, 중앙을 나타낸다.

 ▶화성행궁 = 임금은 주로 본 궁궐에 머무르며 국사를 주관하지만 전란,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본궁을 떠나 지방에 머무르기도 했다. 이때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 행궁이다. 조선시대 행궁은 여러 곳에 지어졌으며, 그중 일시적으로 왕이 지방에 머무르는 경우를 대비한 행궁도 있지만, 화성행궁처럼 왕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위해 지어지는 행궁도 있었다.

 화성행궁은 화산의 현륭원을 참배할 때 머무르던 목적말고도 정조가 양위한 뒤 장차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계획도 세워져 있었다. 이 때문에 그 어떤 행궁보다도 대규모로 건설됐으며 팔달산 동쪽 기슭 화성의 중앙부에 자리잡았다.

 화성 축성 공사와 더불어 증축된 화성행궁은 화성부의 관청과 일체가 돼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행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화성행궁은 1789년 수원읍을 화산 아래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던 초기에 세워졌다. 다만 이때는 신도시의 관아로 쓸 큰 전각 한 채만을 마련했고, 이듬해에 약 340칸의 관아가 완성되면서 행궁의 역할도 아울러 수행했다.

 그러다가 화성 축성을 계기로 해서 행궁도 대대적으로 증축, 1796년 화성 축성이 끝날 무렵에는 건물 576칸이 완성됐다.

 화성행궁의 건물들은 18세기의 일반적인 관청의 수준을 넘지 않는 소박한 것이었다.

 특히 봉수당과 장락당 같은 건물은 왕이 머무는 집이었음에도 불구,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이는 사치나 화려함을 꺼렸던 정조의 생활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1795년 윤 2월 혜경궁 회갑연을 비롯해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치러지기도 한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낙남헌 하나만 남기고 화성행궁의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의도적으로 파괴해 과거 행궁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광복 후에도 행궁은 계속 도립병원으로 이용되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 병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지금은 건물 복원이 이뤄졌다. 이 또한 `화성성역의궤'에 행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조대 최대의 역사였던 수원 화성은 현륭원을 호위하고, 행궁을 둘러싸 수호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해 축성됐다.

 이는 화성행궁과 화성 성곽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 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서장대(西將臺. 사적 3호) = 서장대는 군사지휘본부로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한다.

 서장대는 팔달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성 안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멀리 남쪽과 북쪽 들판이 보여 성 안팎을 두루 살피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서장대의 군사 훈련은 왕이 직접 지휘했다. 1795년 윤 2월 12일, 정조는 화산능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시행했다. 이 훈련은 화성의 방어체계를 점검하고 일원적인 지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만취자의 방화로 소실됐으나 복원공사를 마치고 옛 모습을 되찾아 수원시는 문화재청장, 경기도지사, 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6일 오후 2시 준공식을 갖는다.

 서장대는 지난해 5월 1일 새벽 만취자의 방화로 누각기둥과 서까래 등 누각 2층(19㎡)이 모두 불에 탔으며, 수원시가 4억8천만 원을 들여 서장대를 완전 해체한 뒤 8개월여만에 새롭게 복원했다. 시는 서장대를 복원하면서 주변 석축과 배수로도 함께 정비했으며, 서장대 훼손행위를 감시하기 위한 무인감시카메라를 설치할 계획이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 돈대 내부는 3층이며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층마다 벽면에 포혈 20개씩을 내었으며 서쪽과 북쪽 두 면에 현안 두 개씩을 내었다. 층과 층 사이는 마루판을 여닫도록 문을 만들어 놓았다. 상층의 벽면 위쪽은 판자로 판문을 둘렀으며 판문마다 전안(화살구멍)을 뚫었다. 아래층에는 전돌로 작은 홍예문을 만들어 출입하도록 했다.

 공심돈은 조선시대 성곽에서는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시설로 화성의 축조정신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속이 빈 돈대(墩臺 : 높이 쌓아 망을 보는 시설)'라는 공심돈의 뜻 그대로, 중앙부는 빈 공간으로 둬 공격용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했다. 성벽을 돌출시키고 그 위에 벽돌로 돈대를 쌓고 꼭대기에 군사들이 머물 건물을 올렸고, 석축에는 현안을 두고 돈대에는 층마다 총구멍을 뚫었다.

▲ 화성 장안문
 ▶장안문(長安門) = 장안문은 화성의 북쪽문으로 사실상 정문이라 할 수 있으며 팔달문과 함께 화성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장안은 수도라는 뜻과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였으며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 한 뜻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모래와 진흙에다 물을 섞어 다지면서 시루떡 앉히듯이 켜켜이 쌓아 올렸으며 화강석 기단과 문루의 무게는 물론, 현재 자동차의 통행에 의한 충격까지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문루의 지붕형식은 각 처마가 한데 모여지는 우진각 지붕으로 웅대함과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전쟁시 문루가 불타 훼손된 것을 1975년 축성기록서인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복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수문(北水門) = 누각의 현판에 `화홍문(華虹門)'이라 쓰여 있어 화홍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교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수원천이 화성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를 건널 수 있게 한 북수문과 남수문이 있었다.

 화홍문은 석교로 7개의 홍예문을 내었는데 중앙으로 올수록 넓고 크게 만들어 홍수기의 물살을 흡수하도록 했다.

 수문으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쇠로 만든 전문을 설치했으며 수문 남쪽 하천바닥은 돌을 깔아놓아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바닥이 파이는 것을 막고 있다.

 북수문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남수문은 벽돌로 쌓았는데 남수문은 1922년 7월 대홍수로 유실된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했다.

 ▶동북각루(東北角樓) = 동북각루는 편액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쓴 이후 방화수류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방화수류정은 화홍문의 동쪽 언덕 정상의 용두바위 위에 터를 잡고 있으며 성 바깥쪽의 용연과 어우러져 경관이 수려하다. 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로 사용되는 등 전략상으로도 중요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꺾이고 펼쳐지는 것이 여러 겹으로 전개돼 한국의 다른 건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그 형태가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주위의 자연 경관과도 잘 어울려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정자 앞에는 활쏘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정조는 1797년 행차 때 화성을 순행하다가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고 화성성역의 노고를 치하하며 칠언시를 지은 뒤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했다.

 ▶동장대(東將臺) = 화성의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 2곳이 있다.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를 훈련하고 지휘했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는 별칭이 붙었다. 동장대 왼편 담 밖은 넓은 조련장을 마련, 말타기와 활쏘기 훈련을 할 수 있게 했다.

 이곳은 지형이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요충지다.

 가장 낮은 대에서 2번째 대에 오르는 통로는 계단으로 하지 않고 경사지게 만들어 말을 타고도 직접 오를 수 있게 했다. 전각의 내부 바닥도 3개 층으로 둬 한 칸씩 올라가면서 높아져 지휘하는 장수의 위엄을 고려했다.

 뒤뜰에는 성벽과 동장대 사이에 영롱무늬 담을 두르고 있다. 동장대에 있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군사들이 담 뒤에서 숨어서 몰래 지켜봤다.

 ▶화령전(華寧殿) = 신도시 화성을 건설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정조는 그 꿈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1800년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정조가 승하하자 나라에서는 바로 이듬해 화성에 화령전을 짓도록 했다.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영전으로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 있으며 편액을 순조가 직접 썼다.

 화령전 정당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다. 정당의 건물 뒤편으로 가면 기단 한가운데에 커다란 아궁이가 있다. 이것은 실내에 온돌이 설치돼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정조의 생신을 비롯해 중요한 절기가 되면 화성유수가 이곳에서 제례를 올렸으며 여기에 모셔진 어진은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이후 왕들은 능행시 군복 차림을 했다.

 화령전은 외관이 단정하고 안정돼 있으며 세부는 치밀하게 가공, 공간 구성이 질서정연해 18세기 목조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원시의 화성 성역화 추진
 수원시는 화성의 성역화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성역화의 첫 번째가 화성행궁의 완벽한 복원이다. 현재 600여 칸의 화성행궁 중 482칸만이 복원됐다.

 오는 2010년까지 2단계 사업으로 300억 원 이상을 투입, 완벽한 화성행궁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화성행궁을 세계속의 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수원의 전 시민들은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2004년 초 ICOM KOREA(국제기념물협회 한국위원회) 주관으로 세계문화유산의 활용과 보존에 대한 워크숍 당시 화성과 화성행궁의 보존 및 정비가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산 정비사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는 시민들의 합심에 의한 결과물로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 단기간은 불편스럽지만 장기적으로 시민들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이해가 화성행궁의 복원을 가능하게 했다.

 앞으로 화성행궁의 전통 조경을 되살려 우리 조경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화성행궁 앞에서 종로 네거리에 광장을 조성, 수원의 모든 문화가 화성행궁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게 시 관계자의 전망이다.

 화성행궁은 본격적인 2차 중건 작업이 시작됐다. 이에 앞서 궁중유물전시관에 있는 현판을 복제, 설치해 각 건물의 본연의 모습과 위격을 되찾았다.

 ◇화성행궁 공연 및 시연행사
 수원시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내용을 통한 화성행궁을 호위한 장용외영 군사들의 군사훈련과 행궁 호위의 모습을 `장용영 수위의식'이라는 공연으로 제작, 많은 관람객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조선후기 최대의 군사조직이자 정조에 의해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근간으로 우리 무예의 원형을 간직한 `무예 24기'를 시연하고 있다.

 이에 따라 화성행궁은 단순한 관람용 궁이 아니라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상징인 정조시대의 문물과 학문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됐다.

 화성행궁은 교육과 관광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21세기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세계적인 모델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신호탄이 되고 있다.

 
  (※ 참고 = 이 특집기사는 `수원시 화성사업소'에서 제공해준 자료를 근거로 취재, 작성됐습니다. 편집자 주〉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