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립인천외국어학교에서 인천고등학교까지

▲ 인천고등학교

인천의 중등교육은 초등교육과는 달리 공립교육이 먼저 시작됐다. 남자 학교는 인천고등학교를, 여자 학교는 인천여자고등학교를 꼽을 수 있다.
2008년 2월 제107회 졸업식을 거행한 인천고등학교는 1895년 개교해 113년 역사 속에서 개교와 더불어 몰려 온 외세에 맞서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노력해 온 인천 교육의 산증인이자 자존심이 되는 학교다.

1895년 4월 선포된 교육칙어(勅語)에 따라 칙령 제79호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학교법규인 한성사범학교 관제가 공포되고, 5월에 칙령 제88호로 외국어학교 관제가 공포돼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가 설립되며 인천공립상업학교(인천고등학교 전신)가 시작됐다. 초기에는 인천감리아문 내 경무서를 교사로(내동 84번지) 개조해 일본어 교육을 시작했다. 개교식은 6월 27일에 있었다. 일본어 교육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이외에도 수신, 한문, 수학, 지리, 역사, 이과, 정치, 경제, 법률, 부기, 체조 등의 교과목을 교육했다.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개교 당시의 입학생은 30여 명이었으며, 1898년 5월 25일 첫 졸업식을 가졌고 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두 번째 입학생은 첫 신입생이 입학한 3년 뒤로 15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 1895개교당시교사
1904년 교육행정의 주도권이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관립 인천일어학교로, 1909년 관립 인천실업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2년 이른바 제3차 교명 변경이 있어 인천공립상업학교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3월 31일에는 감리서 교사에서 송림동 교사(현 송림초등학교)로 이전했다. 이후 1933년 4월 1일 인천남공립상업학교와 병합돼 율목동 신축 교사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인천상업학교 학생들은 조선인 차별에 저항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단체행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눈에 띈다.

“인천상업학교는 한국인 학생만 교육하는 유일한 실업학교인데 이날부터 교원, 생도간의 호흡이 맞지 않아 생도 전부가 동맹휴학하다.”(『매일신보』1915.4.17) 
“인천상업학교생 280여명이 만세를 고창하며 시가행진을 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중단됐으며 18명의 학생이 피검되다.”(『동아일보』1930.1.18.)
“인천상업학교 학생으로 학생운동에 관련돼 경찰에 피검된 33명을 학교 당국이 무기정학에 처하다.”(『동아일보』1930.1.21.)

▲ 1933(인고)

“인천상업학교 만세운동으로 구류처분을 받고 수감됐던 5명의 학생이 만기출감하다.” (『동아일보』1930.2.8.)
“교사 배척을 이유로 동맹휴학 중인 인천상업학교는 2·3학년생 전원에게 무기정학처분하다.”(『동아일보』1930.12.10.)
“인천상업학교 조선인과 일본인의 입학률 차별반대 진정.”(『조선중앙일보』1933.4.7.)

한편 1933년 인천공립상업학교와 통합된 인천남공립상업학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다. 일본인 청년들이 영어 연구를 위해 1887년경 영국인을 초빙해 만든 모임인 인천영학사가 그 시작이다. 영어 모임은 몇 차례 중단되다 1892년 1월 성공회의 랜디스 박사를 초빙해 교육을 재개했다. 그러나 랜디스 박사가 따로 영어야학을 개설하자 학생들이 그곳으로 옮겨가 버려 인천영학사의 학생 수는 급격히 감소해 문을 닫게 됐다. 1897년 1월 다시 문을 열고 1908년 사립교육위생회와 합쳐 인천상업야학교가 됐다. 이후 여러 차례 교명 변경이 있었고 1922년 4월 인천남공립상업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3년 4월 1일 율목동(현 정보산업고등학교)에 새 교사를 준공해 이사한 인천공립상업학교로 흡수됐다.
인천공립상업학교는 1946년 9월 1일 인천공립상업중학교가 됐다가, 1951년 8월 30일 인천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자리는 인천고등학교가 주안으로 이사간 후 중앙초등학교가 이용하다가 현재는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가 이용하고 있다.

▲ 인천공립고등여학교
# 인천 여성교육의 요람

2008년 4월 개교 100주년이 되는 인천여자고등학교는 인천 여성 교육의 요람이다. 인문계 여고로는 경기여고에 이어 두 번째로 개교 100돌을 맞는다. 이 학교의 지난 100년의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라가 심히 위태롭던 때에 여성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설립 목적과 그에 부합하는 여성인재 양성으로 배출된 여성들이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고 기여했다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학교는 1908년 4월 6일 재봉 기술을 주로 가르치기 위한 3년제 인천여자실과학교로 개교했다. 학생 수는 25명에 불과했다. 1910년 4년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다가 1911년 실과고등여학교로 바뀌고 1913년 10월 26일 4년제 인천공립고등여학교가 되며 이듬해에 4학급 정도의 규모를 갖춘 학교가 됐다. 1926년 7월 인천전환국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2층 벽돌 건물의 교사를 신축해 9학급 학교로 확대됐다.
광복 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된 6년제 인천여자고등학교가 되고, 1951년 8월 31일 인천여자중학교가 분리됐다. 1961년 2월 28일에는 상인천여자중학교 9학급이 병설됐다가, 1970년 3월 1일 상인천여자중학교가 분리됐다.

▲ 전환국자리의 인천고등여학교

인천지역 여성교육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한 인천여자고등학교는 1998년 7월 29일 현재 연수구 연수동 신축 교사로 이전했다. 1946년 발생한 화재로 1926년 준공한 건물이 모두 타 버리고 6·25전쟁 이후에야 새 교사를 신축해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던 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에는 동인천동사무소와 인천중구문화원이 들어와 이용하고 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43) “인천의 근대 종교시설”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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