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농번기를 앞두고 평야지 일대를 선택해 두루 둘러봤다. 생각과는 달리 들녘에서 정겨운 예전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봄내음이 가득한 계절이 되면 언제나 따뜻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감싸주었던 농촌의 공간, 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한 미소처럼 웃음 가득한 농민들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단지 겨울로부터 계절의 바통을 넘겨받고 있는 봄의 몸부림만이 은빛 물살에 소리 없이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농촌은 ’춘래불사춘’
 
농업과·농촌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조화시키며,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국토의 정원으로서, 문화 전통의 보존지로서, 그리고 환경생태계의 현장으로서 농업·농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난 30여 년 사이에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을 경험하면서 이 같은 농업의 외연적 공익가치를 그만 잊어버리게 됐다. 농업의 가치를 단순히 식량과 농산물을 생산하는 상품기능으로만 한정해 평가절하하고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농업·농촌의 발전은 쇠퇴해져 버렸고, 세계시장 속에서 도태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옛날 한나라 때 흉노족에게 시집간 왕소군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지었다는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ㆍ봄은 왔으나 봄 같지가 않다)이라는 시구(詩句)처럼 농촌에서 느끼는 봄은 진정한 봄의 모습이 아니었다. 농촌이 이처럼 조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 고령화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다 젊은이들의 대학생 농활도 사라져 가고 있다. 얼마 전, 여름방학이면 의례적으로 행해지던 농활(대학생 농촌봉사활동)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농활은 오늘의 기성세대에게는 대학시절 여름방학의 추억이지만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어학연수나 국토대장정과 같은 말에 비해 다소 생소한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대학시절 선배들이 대학생의 낭만을 읊으면, 단연 빠지지 않는 주제가 농활이었다. 땀 흘리고 먹는 막걸리 한 사발을 추억하며 선배들은 농활에서의 에피소드를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다. 이런 선배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농활이란 두 글자에 막연한 동경심이 모락모락 피워 올랐었다. 지금은 추억거리가 되었지만, 농활 근로 중 가장 고된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 ‘피사리’를 뽑는 일이었다. 사실 피와 묘를 구분하는 것이 처음 일을 하는 대학생들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종종 큰 사고를 치곤했다. 이렇게 시작된 ‘농활’은 90년대 대학생들의 농촌체험 및 일손 돕기로 이어졌으나, 이제 일부 대학에서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설정이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힘든 일을 기피하는 학생들이 ‘농활’ 대신 학점취득, 취업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해외봉사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학마다 ‘농활’ 참여 학생 수는 채우기도 힘든 반면 해외봉사 활동 참가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대학생들 농활의 의미를 되새겨야

해마다 농활을 가는 대학생들이 줄어들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농활이 의미가 있는 건 젊음의 땀과 열정으로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는 값진 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에게 이런 농촌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없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단지 일부 농과대학 등의 농활동아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농활은 공과대학생에게도 필요하다. 대학에서 배운 공학 지식을 바탕으로 경운기, 트랙터 등의 농기계를 수리하고 노후화된 농가의 전기배선 시설 등을 고쳐주는 실습장 역할도 한다. 이런 프로그램처럼 ‘농활’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각 학과마다의 특성을 살려 낼 수 있는 농촌봉사활동으로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좋겠다. 또한 각 대학과 농촌의 지속적인 연계를 통해 대학생 ‘농활’이 부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마련이 긴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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