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은 인물 중에 하나가 이옥경(李玉慶, 1902(?)~?)이다. 순수 문화 예술인이라기보다는 방송인 혹은 방송 언론인의 범주에 두는 것이 옳겠지만 ‘문화’의 개념을 좀더 넓게 확장해서, 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이옥경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약 40년 전, 조선 여성으로 고등여학교를 다닌 이옥경 여사는 인천해관 관리이자 제령학교 영어 강사였던 이학인 씨의 무남독녀로 인천 최초의 일본 여학교 출신이다. 그녀는 경성방송국의 초대 여자 아나운서였다. 부군 노창성 씨는 금년에 작고했다.”
이 글은 1955년에 출판된 고일(高逸) 선생의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 「외국인 학교」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이옥경의 부친인 이학인(李學仁)에 대한 『인천시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 이옥경 아나운서

“인천사립제령학교(仁川私立濟寧學校)가 1903년 6월에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순수 민간인에 의한 경영으로서 객주조합(客主組合)의 전신인 신상회사(紳商會社)의 사장 서상빈(徐相彬)이 세웠다. 서상빈은 인천이 국제 무역항이며 서울의 관문인 산업도시이기 때문에 지역 발전을 위해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김정곤(金貞坤)의 도움을 받아 내동에 초가 30여 평의 건물을 짓고 개교했다. 김정곤은 인천 앞 바다에 격침된 러시아 함을 인양하여 거액을 치부한 사람이었다.
이 학교에는 야학(夜學)과 주학(晝學)이 있었다. 야학은 인천외국어학교 출신으로 인천해관(仁川海關)에서 근무하는 방판(幇判)들이 교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강사 중에는 강준(姜準), 장기빈(張箕彬, 張勉의 부친), 이학인(李學仁), 이용인(李容仁) 등이 있었다. 주학에서는 주로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수석교사는 서병희(徐丙熙)였고 교무는 서병협(徐丙協)으로 관립외국어학교 교관을 겸했다.”
이것이 이학인과 관련한 기록의 전부인데, 이를 통해 당시 우리 인천 사회 혹은 인천 교육 현실의 한 단면과 지역 유지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내용 그대로 이학인은 해관 즉 오늘날의 세관(稅關) 관리로서 영어가 가능한 인텔리인 데다가 후진 교육에 뜻을 가진 인천의 유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이런 인물이었다면 무남독녀인 이옥경을 인천고등여학교 정도의 교육은 당연히 받게 했을 것이고, 도쿄 유학도 어렵지 않게 보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옥경이 유학한 학교는 도쿄에 있는 일본여자음악학교다. 음악학교를 지망한 것은 그녀가 성악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옥경이 목소리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운서에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옥경은 1927년 한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된다. 그 사연을 적은 몇몇 인터넷의 기록 내용들을 살펴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는 마현경과 이옥경이다. 이옥경은 인천고등여자학교를 나와 도쿄의 일본여자음악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경성방송국 개국 첫 날 발탁되어서 방송을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다지 오래 근무하지는 않고 1930년에 방송국을 떠났다.”
▲ 이옥경 가족사진
“경성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호출 부호 JODK, 출력 1kW, 주파수 870kHz(690kHz라는 기록도 있음)로 본방송을 개시하였다. JODK의 한국인 직원은 기술부에 노창성, 한덕봉 등 기술자와 프로그램 담당 최승일, 그리고 여자 아나운서인 이옥경과 마현경까지 합쳐 4~5명에 지나지 않았다. 마현경과 이옥경의 채용은 공개 모집이 아닌 추천에 의한 채용으로 공개 채용은 그보다 훨씬 후에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이옥경은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어 1927년에 개국한 경성방송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채용 과정도 ‘첫날 발탁’이나 ‘추천’에 의했다고 하는데 그녀를 ‘발탁하고 추천한’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남편인 노창성(盧昌成, 1896~1955)이라는 사실이다.
그 무렵 노창성은 조선총독부 체신국 직원으로 방송국 설립의 기술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개국이 가까워 시험 방송을 하던 중 아나운서가 모두 남자여서 청취하는 시민들이 딱딱하게 느낄 것을 염려한 노창성이 문득 미모에다가 고운 목소리를 겸비한, 그러면서 일본어에 능통한 부인 이옥경에게 아나운서 역할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를 탄생시킨 노창성은 누구인가. 1955년에 발간된 『대한연감』에 따르면 노창성은 서울 출신으로 동경고공(東京高工) 전기화학과를 졸업한 기술자였다. 자세한 연대는 나와 있지 않으나 ‘조선방송협회 제2방송부장 및 사업부장’ ‘동양전선주식회사 생산부장’ ‘조선방송협회 방송국장’ 그리고 훗날 ‘공보처 방송관리국장’을 지낸 경력이 나와 있다. 그보다 앞선 1925~1926년도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을 보면 노창성이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인 체신국 공무과 기수(技手)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풍문처럼 ‘동경 유학 시절부터 사랑이 싹텄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옥경이 학교를 중도에서 그만둔 것이 결혼과 관련이 있는 듯 싶다.
앞서의 내용과 다소 상이한 부분이 보이지만 이옥경에 대한 또다른 기록으로 1935년 『삼천리』8월호에 실린 “아릿따운 「아나운사」-경성방송국의 녀성 아나운사들-”이란 기사 원문을 그대로 전재해 본다. 아나운서 선구자 이옥경에 대한 극찬이 보인다.

“그러면 이 여자 아나운써-라는 새로운 직업선에 처음으로 용감히 발을 내여민 여자는 과연 누구일가.
이 여자 아나운써-라는 일흠 붙어도 그때의 조선 사람들 귀에는 잘 익지 못하엿든 만큼 그에 지망하는 여자도 물론 만치 않었다.
오즉 한 분의 귀여운 지망자가 있었으니 그이는, 당시붙어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여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방송국 사무에 노력을 악기지 않으시는 노창성 씨의 부인되시는 이옥경 씨이였다.
이 이옥경 씨는 그러면 어떠한 분이길내 조선에서 처음인 여자 아나운써-로 나오게 되엿든고? 그는 물론 남편의 깁흔 이해와 지도가 있기 때문이엿섯겟지만는 그보다도 그의 어린 처녀 시절붙어가 그 부인으로 하야금 조선서 처음인 여자 아나운써-란 직무에 감히 나스게 만들었다고 봄이 옳을가 한다.
그러면 그 어린 처녀시절은 어떠하엿스며 그 가정은 어떠하엿든고?

   
 

이옥경 씨는 인천에서 나서 그곳에서 소학교를 단이게 되였었다. 씨(氏)는 본래 태여나기를 귀하게 명문의 가정에서 태여낫스니 그의 부친은 그 당시에 인천 세관 관장이란 놉흔 요직에 잇섯슴을 보아도 그가 어린 시절붙어 얼마나 호화스럽게 귀엽게 또한 부모의 사랑 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며 자라낫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후 씨는 부친이 안동현 세관 관장으로 전임되여 가게 되매 부모를 따라 이역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으로 가게 되였다.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로 곳 안동현 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었다.
씨는 어려서붙어 미모의 사랑스러운 얼골을 가젓스며 또한 그의 목소리는 명랑하고도 아름다웟다. 그는 소학교 시절이나 이곳 고등여학교 시절이나 늘 학교에서는 선생 앞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님과 아버님 앞에서 그 고흔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좋와하였다.
그렇게 영이하게 생긴 씨는 학교에서 공부도 남에 빼나게 늘 우수한 성적을 어덧다.
그러한 씨가 또한 조선 녀자로서는 국어를 남달니 잘 하엿슬 것은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였다. 인천 소학교을 마추고 안동현 고등여학교를 마춘 씨는 그 당시의 조선 여자로서는 어더보기 드물게 유창하게 흘너네리는 물처럼 국어을 잘한 것은 조금도 기이할 것이 없었다.
그러튼 이옥경 씨는 학교를 졸업하자 현재 남편 되시는 노창성 씨와 결혼을 하게 되였다.
당시의 노씨는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엿섯스니 결혼 후의 이씨가 라듸오 방송에 대하야 다소간의 지식을 갓게 되엿고 또한 유의하엿슬 것도 당연한 일의 하나이였다.
이씨는 그렇게 다복한 신혼생활 중에서도 남편의 하시는 그 업무에 깁흔 이해와 동정을 가지게 되엿슴인지 또는 남편의 간곡한 충언으로 엿슴인지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비로서 가정에서의 주부생활을 버서나서 처음으로 경성 방송국 방송실의 마이크로폰-앞헤 나스게 되였었다.
실로 지금에 앉어 생각하여 보면 그 때의 이씨의 행동은 참으로 대담함이 있었다.

그때만 하여도 라듸오의 청취층에 조선 사람들이 대단 귀하였고 대개는 일본 내지인이였음으로 이씨의 입에서 흘너 나오는 국어는 조금도 그들에게 불만족함이 없이 유창하였다.

▲ 이옥경의 딸 노라노

아무리 말 잘하고,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처음으로 마이크로폰-앞헤 나스면 말문이 꽉 맥키고 또한 말의 고저, 장단을 잘 마추워 방송하지 못하면 모든 청취자들에게 불만을 주고 또한 무슨 말인지도 알아듯지 못하는 경우가 하두 많은데도 이씨만은 그에 대한 소질를 가젓슴인지, 천재로 태여낫슴인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약간의 실수도 없이 매일 매일 마이크로 폰- 앞에서 수만의 인사를 대하여 정답게 고흔 목소리로 방송하게 되엿스니 그의 그 때의 큰 이상은 많은 청취자들을 한가정과 같이 늘 생각하엿다고 한다.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 뱃꽃같이 하얀 살결 동그스럼한 그에 얼골, 호리호리한 몸맵시 명랑한 목소리는 그 때의 방송국 안 여러 사람들의 눈을 황홀케 한 때가 많었다고 한다.
그 후 씨는 한 어린이의 어머니로 될 숙명적 운명에 닥다렷스니 그는 하는 수없이 가정의 복음자리로 다시금 들어가고야 말았다.
지금의 이옥경 씨는 노씨와 단란한 가정을 일우워 5남매의 귀여운 어린 것들의 재롱을 벗하여 그날그날 주부로서의 현모양처로 지낸다고 한다.”
훗날까지 이옥경과 노창성 사이에는 총 아홉 자녀가 있었다고 한다. 자녀 중에 한 명이 부모의 재능과 선구자적 정신을 물려받은 듯 또한번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을 세운다. 다름 아닌 ‘한국 최초 여성 패션디자이너 노명자’, 즉 노라 노 씨다. 노라 노 씨는 금년 팔십 연세이다. 참고로 노라 노 씨에 대한 모 신문 기사를 옮겨 본다.

“재력가이면서 경성방송국 설립자였던 아버지 노창성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선각자였던 부모만큼이나 비범한 삶을 살았다. 1947년 그녀는 19살의 나이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났고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가 돼 돌아왔다. 옷이라면 전통 의상이 고작이었던 시절, 뉴욕 5번가의 패션을 한국 땅에 상륙시킨 장본인인 것이다. 노라 노는 단순히 한국 최초 여성 패션 디자이너만이 아니라 패션을 통한 문화 혁명가였다. 판탈롱과 미니스커트 등 당대의 충격적인 문화적 아이템들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것도 바로 그녀였다.”

아쉬운 것은 인천 해관 방판이었던 이학인과 그의 외동딸 이옥경, 그리고 외손녀 노라 노. 이 인천의 명문가의 내력이나 가계의 기록은 고사하고 이 같은 사실조차도 우리 『인천시사』는 단 한 줄의 기록을 가지지 못한 형편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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