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석용 인천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물류중심, 관광중심, 비즈니스 센터, 첨단 산업도시... 이제 이런 도시발전 전략을 내놓지 않는 광역도시는 대한민국에 한 군데도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광역자치단체의 목표는 모두 똑 같다. 심지어 전국 어디를 여행해도 대한민국의 대표도시, 동북아의 중심, 심지어 세계의 중심을 표방하지 않는 도, 시, 군, 구가 없다.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는 하나 같이 통이 크다. 언필칭 “동북아”이고 “세계”다. 또한 “모든 도시”가 “모든 산업”의 중심이다. 내가 아는 한 세계적으로 이렇게 ‘뻥’이 센 나라는 달리 찾기 어렵다.
제대로 된 계획만 뒷받침이 된다면 야심이 크다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호랑이를 그리려고 해야 고양이라도 그린다는 유치한 속설에도 한 조각의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닌 것이 빤한 일을 허풍으로 우겨대는 모습이 아름답거나 믿음직스러워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좀 더 지나치면 속이 메스꺼워질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수준 떨어지는 정치문화 탓을 할 수도 있고 결국 국민이 문제다라는 극단적인 비관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원시적인 이유는 제쳐두고 좀 더 직접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지방자치단체를 이끌고 있는 정치인들의 리더십에 초점이 잡힌다.

우리나라의 자치단체장들은 대체로 제왕적이고 소공화국의 총통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모든 지방자치단체의 장들을 면접하고 분석한 사실이 없으니 경망하고 주제를 넘는 판단일 수 있다. 또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억울한 목민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사실로 미루어 보거나 매체들을 통해서 접하는 그들의 주장이 대체로 그렇게 보인다는 생각을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암튼 그들은 중후장대(重厚長大) 지향적이고 권력적이며 독불장군형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현재 위치는 다음 단계 권력에 진입하기 위한 발판으로 인식될 뿐 현 단계에서 완성된 주민 봉사자로서의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지방자치단체는 리더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운명자결주의적(運命自決主義的) 권력 단위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아니오”다. 경제학이나 법학, 정치학의 통설적인 입장에서도 “아니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현행 법률체계상 지방자치단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은 별로 보잘 것이 없고 경제에 관한 그들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도시개발계획은 국토개발계획의 하위 개념일 수밖에 없고 지방정부는 재정과 금융에 있어서 거의 아무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국가 전반의 운영체계를 결정하는 입법 권한을 지방자치조직이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조직 체계는 세계 공통의 현상이고 이러한 질서 개념이 생겨나는 데는 “하나의 국경 내에서 유지돼야 하는 효율성 문제”라고 하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지방분권화의 시대라 하더라도 하나의 지방정부가 국가의 권력을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지방분권은 잘 조정된 네트워크 속에서 지역의 역할을 찾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조정(調整)되지 않은 지방정부 간의 과잉경쟁은 공동의 몰락을 재촉할 뿐이다. 과잉경쟁은 과잉개발을 유발하게 되고 과잉개발은 필연적으로 한 국가 경제에 회복할 수 없는 낭비를 만들어 내게 마련이어서 그렇다.

이제 이 나라는 정말로 심각하게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역할분담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치밀하게 각 지방을 효율적인 네트워크로 구성하고 조정해야 하며 지방정부는 이러한 기획이 최대의 능률로 실현될 수 있는 지역적인 전략에 집중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산업의 재배치를 결정하고 에너지 정책을 주무르며 국제적인 물류 운송 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방정부가 최우선적으로 몰입해야 하는 분야는 능률적이고 쾌적한 도시의 배치와 문화와 역사의 보존이며 시민들의 안전한 생활이다.
요즘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덕목은 모두 상위 조직에 들이대는 것이고 밀어붙이기 뿐인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다. 설득할 수 없다면 설득 당할 줄도 알아야 하련만 도무지 대화의 의지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통제되지 않는 가족 구성원의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콩가루 집안을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콩가루 국가가 아닐까. 때로는 한 자치단체장의 정치적인 과욕이 시민이나 국민에게 ‘공공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들 스스로에게는 정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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