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현재 해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는 1946년 1월 17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개교한 ‘해군병학교’다. 그러나 이보다 50여 년 전에 이미 근대식 해군사관학교가 강화도에 위치해 있었으니 ‘조선수사 해방학당(일명 총제영학당)’이 그것이다. 이 학당이 들어서 있던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61번지 일대는 현재 인천시지정 지방기념물 제49호 ‘통제영학당지’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막강했던 조선의 해군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쇠락해져 갔던 반면, 근대식 전함과 병력으로 무장한 서구열강과 일본의 해군력은 나날이 강해져 조선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세 차례의 외침으로 나타났고, 무력한 조선의 해군력으로 근대화된 이들의 해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근대식 해군양성을 위해

개항 이전 세 차례의 외침을 겪은 데 이어 개항 직후부터 서양과 일본의 화륜선들이 바다를 출입하기 시작하자 조정에서는 근대식 해군 양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인천이 개항되던 해인 고종 20년(1883) 12월 조선은 경기도 연해지방의 방어를 목적으로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부평부에 설치하는 한편, 민영목(閔泳穆)을 1품아문의 수장인 기연해방사무에 임명했다. 기연해방영은 기존의 수군편제에서 벗어나 경기 일대의 수군과 육군을 총괄하는 매우 막강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병력의 근대화를 위해 미국인 교관을 초빙해 훈련시키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淸)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독자적인 해군력 강화를 통해 청의 군사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던 조선정부의 노력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그로 인해 기연해방영에 소속시켰던 진무영 등 각 군영을 독립시켰으며, 1885년에는 부평부에 있던 해방영을 용산으로 이설했다. 개항장 인천과 서해바다 가까이에 있던 부평부에서 내륙인 용산으로 해군의 사령부가 옮겨가게 되면서 연해를 방어하고자 했던 당초의 기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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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3년 1월 고종은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민응식(閔應植)을 삼도육군통어사에 임명하는 한편, 청주에 있던 통어영을 남양부로 이설했다. 또, 각 도마다 육군은 설치돼 있으나 연해 요충지는 방비가 매우 소홀하다 해서 삼도육군통어영의 이름을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으로 바꿨고, 해연총제사가 강화유수 및 진무사를 겸하게 해 경기 연해 및 인천 연안의 해방을 총괄하도록 했다. 총제사가 강화유수를 겸하고, 1품인 독판내무부사 민응식을 총제사로 임명한 것은 장차 독자적인 해군을 창설하고 그것을 총괄하는 군영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연총제사가 강화유수를 겸하면서 강화부에 해군동영(海軍東營)을 두었고,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을 별도로 설치했다. 수사해방학당은 총제영에서 설치했다 해서 총제영학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당시 해군동영과 수사해방학당에는 15세 이상과 20세 이하의 생도 50명과 수병 500명을 모집해 훈련시키려 했으나, 실제 모집된 인원은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 명 정도였다. 수사해방학당 생도들에 대한 교육은 본격적인 군사교육에 앞서 영어교육이 1893년 9월경부터 실시됐으며, 이듬해 4월 영국에서 파견된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대위와 조교 커티스(J. W. Curtis)하사에 의해 본격적인 군사교육이 시작됐다. 그러나 군사교육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외의 정국이 불안해졌고, 해연총제영이 혁파되면서 수사해방학당은 운영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11월 영어교사 허치슨(W. du F. Hutchison)이 한성외국어학교로 옮겨가고, 조정
   
 
에서 학당의 운영자금을 경리청으로 이관시킴으로써 수사해방학당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됐다.

  # 조선수사 해방학당의 명칭과 규모

조선수사 해방학당은 강화도의 관문이었던 갑곶나루 진해루 바로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이 자리는 병인박해 시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성지로 천주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인천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지정해 보존·관리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재청에 등록돼 있는 공식 명칭은 ‘강화통제영학당지’다. 당시 수군과 관련해 통제영의 명칭을 사용했던 기관으로는 수군통제영(水軍統制營)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27년(1594) 경상, 전라, 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에 설치돼 1895년 없어질 때까지 약 300년간을 존속했다. 하삼도의 수군을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된 통제영에 소속된 수사해방학당이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당시의 문헌기록에는 이 학당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우선 교관계약서 등 공식적인 문서에 등장하는 학당의 명칭은 조선수사 해방학당이다. 그 외에도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 해군학당(海軍學堂) 등의 명칭이 보이지만 통제영학당으로 기록한 문서는 거의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 학당의 명칭은 ‘통제영학당’이 아닌 ‘조선수사 해방학당’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조선수사 해방학당 기숙사 구역 현재모습
1894년 3월 2일 일본 해군대위 미나미 요시요야(南義親)가 강화도의 해군관청을 시찰하고 보고한 첩보문서에 조선수사 해방학당의 규모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이 강화도에 근대해군의 양성을 위한 학당과 군영을 설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대위를 파견해 정탐을 했던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조선수사 해방학당의 건물 규모, 위치, 생도, 교육법 등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강화도의 해군력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학당은 생도의 수업을 담당했던 학교 본관 구역과 교관 또는 생도들이 생활했던 기숙사 구역으로 구분돼 있었다. 본관 구역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갑곶리 1061번지 일대에, 기숙사 구역은 여기서 200~300m 떨어진 언덕(지금의 천주교성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관 구역은 장방형의 담장 안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사당(敎師堂)과 을호 생도 기숙사로 구성돼 있었고, 건물들은 서양식 외관을 하고 있는 절충식 건물이었으며, 장축의 길이가 최소한 10m 이상 되는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있었던 기숙사 구역은 다시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갑호 생도의 기숙사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를 가르치던 영경교당(英經敎堂)이었다.

  # 조선수사 해방학당에 대한 몇 가지 제언

1893년 9월경 근대식 해군 양성을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 운영됐던 조선수사 해방학당은 일반 수군의 조련이 아닌 수사(水師) 즉, 장교의 육성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전통적인 방식에 따르면 수사는 무과(武科)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것으로 일정한 인원을 모아놓고 수사를 양성하는 방식은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을 훈련할 교관으로 영국인 해군대위를 초빙했다는 것은 이 학당이 근대 해군체제를 확립할 목적에서 설치됐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수사 해방학당이 불과 1년여 만에 문을 닫았고, 여기서 배출된 생도들이 수사로 임용됐다는 근거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를 우리나라 해군사관학교의 효시라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구제(舊制)에서 탈피해 분명 장교의 배출을 목적으로 창설된 국가기관이라는 점에서 이 학당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라는 지위를 붙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조선수사 해방학당 발굴조사 전경

또 하나, 이 학당에 대한 공식 명칭이 여전히 ‘통제영학당’이라 불리고 있다는 점도 속히 개선돼야 할 점이다. 이 학당과 통제영은 아무런 연관이 없음과 이 학당의 공식 명칭이 ‘조선수사 해방학당’이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화재 관련 자료에는 학당이 있던 자리를 ‘통제영학당’으로 명기하고 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충분한 검토를 통해 ‘조선수사 해방학당지’로 문화재 지정명칭의 정정이 필요한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80회)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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