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문학단체에서 문학기행 코스로 법주사를 갔다. 절 구경으로 끝나는 답사가 아니라 마음의 탐방을 해 보자며 스님의 설법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법주사 총무국장으로 계시는 스님께서 흔쾌히 우리의 뜻을 받아 주셨다. 스님의 설법 중에서 특히 내 마음을 움직인 부분이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이다 보니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돈을 좇는 데 온 생이 팔려 정작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행복하려면 마음을 채워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욕망이 원하는 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다는 진리를 우리를 잊고 산다.
사람들은 마치 무한히 살 것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생명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 모든 만물은 공평하게도 유한하기 때문에 똑같은 값어치로 소중하다. 그래서 지금, 내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현재는 잡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을 중히 여겨라. 중하게 격을 높여 주면 스스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업은 현재가 모여서 만들어진 내 자화상이다. 특히 여행은 존재의 확인을 위한 필수선택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자연과 교감하고 호젓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나를 채우는 때인 것이다. 그러면서 돈 많이 벌어 놓고 여행다니겠다는 말은 공수표라 하셨다.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은 미물도 같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풀과 나무, 작은 곤충들까지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이 세상은 서로 겹겹이 만들어진 인연으로 엮인 관계다. 못난 게 있으면 잘난 것도 있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관계다. 행복하기를 원하거든 공존하는 법을 배워라. 행복의 정체를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세상의 종교는 모두 인간의 정신세계를 무한히 개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꽃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 꽃은 때에 따라 석가도 되고 예수도 되고 세상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이상형을 말한다. 참으로 행복해지고 싶으면 네가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신이 되어라. 마음 다스림은 절대로 남이 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무지는 모든 불안의 원인이다. 깨우쳐서 알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짐작했겠지만 무지는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박사보다 무지렁이 촌부의 마음 속에 천당이 자리할 확률이 높다.

집착은 번민을 낳는다. 물질이든 인간관계이든 집착을 하면 할수록 결국은 상처를 주고 나에게서 떠나간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모든 갈등은 집착이 원인이다. 사바세계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다. 모래바람을 잠재울 힘은 각자 개인의 몫이다. 세상이 마뜩치 않다고 불만만 하기엔 내가 쌓은 업이 너무 많다. 티베트인들의 오체투지를 보면 숭고하다. 인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부처에게 다가가는 자세라 불심으로 봉양하는 마음이 경건하다. 이렇게 나를 낮추고 세상을 보면, 시빗거리도 지나친 욕심도 거만함도 다 털어 버린 정화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순정한 마음에 무엇이 들어오겠나? 바로 행복이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우루루 관광열차 타고 휩쓸려 가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서 화려하고 성공하고 돈 되는 것 같아 쫓아다니지만 더 많이 더 빨리 나 혼자만 갖겠다는 사람들 무리에 너도나도 다 같이 몰려다니는 것이지요. 카드깡 하는 사람마냥 쫓기고 초조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유머와 페이소스, 선승으로서의 혜안, 정곡을 찌르는 비유, 부드러운 목소리와 가식 없는 겸손함. 스님의 강연은 오늘 문학기행의 백미였다. 사는 게 바빠서 여유가 없다는 핑계는 더 이상 핑계거리가 못 될 것 같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간편한 문자보다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고 인간미 따뜻한 필체를 담아 편지를 보내고 싶다. 거울 앞에서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간도 가져 보고 싶다. 어느 구석에 오만한 뿔을 감추고 있는지 살피고, 곳곳에 도사린 차가운 마음을 걷어내고 싶어진다. 내 자식이라고 내 뜻대로 휘두르지는 않았는지,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집착과 소유도 느슨하게 풀어놓고 싶다. 불교에서 보살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사랑이 모여진 어머니 같은 존재라는데 독실한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산사에서 마주한 스님의 인사 ‘보살님’이란 호칭이 부끄럽지 않기를 소망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