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하늘로 닿아 있었다. 터널을 이룬 나뭇가지들 틈으로 하늘이 잠깐씩 보인다. 한 차례 바람이 비를 몰고 지나간다. 며칠을 연이어 내리고 있는 비는 이 숲의 수목들을 농밀한 운무로 감싸고 그들의 숨소리를 집음기처럼 모아서 숲에다 풀어 놓는다. 가깝게 나무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숲길이다. 내처 위로만 오르던 길이 한 굽이를 돌아 끝나는 곳에 선원이 보인다. 선원 초입에는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파헤친 공터가 있다. 가장자리엔 맨살을 드러낸 황토의 벌건 흙무더기가 눈을 찌른다. 제자리를 벗어나 빗물에 쓸려 흘러내린 황토의 자국이 상처의 진물 같다.
‘템플 스테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원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일주문도 사천왕도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온 그 길의 끝에서 또 하나의 인연을 본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하늘엔 달빛이 가득 흐른다. 크레이터 현상이란 걸 알면서도 달에 새겨져 있는 음영은 신비롭다. 흘러가는 구름에 잠깐씩 달이 모습을 감췄다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달빛이 가려지면 신화의 땅같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미물들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다. 쉽게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산사의 밤이다.
면벽을 하고 앉는다. 숨소리마저 잦아들어 고요하다. 가끔씩 정적을 깨는 죽비 소리만 허공을 가른다.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 숨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산소의 공급과 폐기해야 할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위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깊은 호흡만으로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스님은 머리를 비우라고 한다. 무념의 상태에서 눈을 감으라고 한다. 무념무상. 생각의 꼬리를 자르려고 애를 써 본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갖 잡념들이 뒤얽혀 무질서하다. 처음 해 보는 참선은 그다지 효력을 보이지 않는다. 나를 다스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스님의 죽비 소리가 침묵을 깬다. 참선보다 참선에서 돌아 나오는 길이 더 중요하다며 스님은 선방을 돌았다. “참선에서 일상으로의 회귀는 허허롭게 풀었던 육신을 잡아 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몸에 해가 없습니다.”
수행자들이 스님의 뒤를 따라 묵언으로 선방을 돈다. 저마다 걸음이 규칙적이지를 못하고 힘이 든다. 묶는 것도 버리는 것도 풀어주는 것도 모두가 제 몫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 깊이 품지도 그렇다고 홀대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마음을 정갈하게 정리해 투명한 육신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다.

정식으로 밥 공양을 해 본다. 절차와 법도는 수행자의 마음을 정화하는 데 중요한 장치다. 일용할 먹을거리에 대한 감사와 청결이 밥 공양 속에 들어 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몸낮춤을 마음에 새기며 밥을 먹는다. 음식을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음은 바늘 귀 만한 목구멍을 가진 아귀를 위한 배려도 있지만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수고한 이에 대한 감사와 병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염병이 창궐하던 옛날에도 절에는 역병이 돌지 않았다고 한다. 중생의 구도는 정신과 육체가 다같이 중요한 수행 방법인 모양이다. 바리때를 씻은 물을 모은 것을 청수라고 하는데, 이 물이 청정하지 않다고 주지 스님은 청수를 다 나누어 마시라고 한다. 더러운 청수 물을 받아 마시자 속이 울렁거린다. 아직 불법에 다가서기에는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겸손해진다.

아침 공양 후에 울력이 있다. 노력하지 않은 것에 욕심내지 말라는 선승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소박하지만 땀 흘려 거둬들인 것만이 내 것이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의 울력이 적당하게 몸을 이완시켜 마음까지 뿌듯해진다. 파석을 깔아놓은 선원 마당 곳곳에 잡초가 수북이 자라 있다. 어제 낮까지 내리 일주일을 퍼부은 비 때문에 잡풀은 쑥쑥 잘 뽑힌다. 뽑힌 풀뿌리 주변엔 파석이 헤쳐지고 굵은 지렁이들이 꿈틀거린다. 막힘없이 내리쬐는 햇볕으로 바닥의 수분이 곧 말라갈 텐데, 지렁이들은 말라가는 땅바닥 위에서 마냥 여유를 부린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막막함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가지는 업보인가?
돌아다본 선원은 여전히 고요하다. 깊은 산속이라 인적이 없고 불자를 끌어 모아 절을 번성시킬 의사가 없는 스님이 청정해 보인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에 씻긴 말간 하늘이 너무나 깨끗해 가슴이 시리다. 올려다본 저 하늘빛처럼, 속세로 돌아가는 덜 여문 중생을 배웅하시는 스님의 미소처럼. 못난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산길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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