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란을 집에서 기르면 항상 난향이 끊이지를 않는다.
난향은 은은하게 멀리 퍼지는 향으로, 맑은 날 오전에 그 향의 그윽함을 느낄 수가 있으며 잎의 단아한 매력에 빠지면 화려한 꽃은 가까이 두지 않는다.
사군자 중의 하나로 오래전부터 우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식물 중의 하나다.
오래된 친구를 지란지교(芝蘭之交)로 표현하는데, 이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이 향기로운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높은 사귐을 이르는 한자 성어다.
# 동양란은 내 운명
“동양란은 내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주위에 성공한 농장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자만하지 않고 늘 배우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품종을 개발한 난이 국제시장을 선도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양란을 재배하는 아버지 김서규(58)씨의 뒤를 이어 난 육종에 앞장서고 있는 남양주 의성난원 김도환(30)대표의 난(蘭)사랑은 각별하다.
김 대표는 원래 고등학교 때 꿈이 컴퓨터 전공이었지만 한국농업대학 화훼과에 들어가 그때부터 집안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한국농업대학에서 화훼학을 전공해 지식을 쌓았다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한경대학교 원예학과 3년에 편입했으며, 서울시립대 대학원 원예전공 석사학위까지 이수했다.
직접 일에 뛰어들고 보니 생각만큼 만만하고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가 분명히 나온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농사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사전에 준비도 없이 ‘하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동양란 재배에 뛰어들었다가 심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는 등 뒤늦게 농사에 뛰어든 신참 농사꾼으로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한다. 동양란 재배는 빛, 물, 온도, 통풍, 습도 등 5대 요소를 알아야 하는데도 사전 지식없이 무조건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발상이었다.
그는 농업대 다닐 때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개념이 안 잡혀 연구할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 동양란 재배농 중 일인자로 알려져 있던 아버지가 급속히 보급된 인터넷으로 인한 (난 재배)정보 공유로 평준화되면서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난 재배 등 육묘 정보는 사업비밀로 문서화된 것이 없었고 난 재배를 하고 있거나 원하는 사람들의 농장 내 방문은 절대 금지했던 시절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경쟁자들을 찾아보기도 했고 한경대로 진학하면서 연구소도 찾아가 보고 학회지 저자를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했다. 한농대 다닐 때 실습농장 가운데 조직배양을 잘하는 곳을 찾아 갔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교배라는 것은 수십 가지 모주가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양해를 구해 약간의 모주를 얻어 실험했다. 이것이 난에 관한 연구의 시작이었다는 것.
“원래 동양란이 병이 많은데 유기농으로 실제 효과를 봤다. 5~6년 전 (동양란)전체 재배면적의 30~40% 정도에서 죽는 개체 수가 많았는데 유기농을 도입하면서 균을 이용, 미생물을 통해 죽이는 방법으로 발병률을 10% 미만대로 최소화시켰다. 그 결과 1억 원 정도 비용이 절감됐다. 시일 걸리는 것은 실패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20~30개 파트로 나눠 한 번에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
김 대표는 동양란은 초기 자금이 많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서양란보다 소요되는 자금이 10배나 차이가 난다. 종묘 구입 시 서양란은 몇 천만 원 정도지만 동양란은 수억 원이나 투자해야 한다. 특히 보통 새 품종 하나를 개발하는 데 7~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데다 자체 조직배양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단기적으로나마 중국이나 타이완에서 종묘를 수입하는 것이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난이 좋아서, 그것도 노력하는 만큼의 수익과 평생직장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만족스러울 뿐”이라는 김 대표는 “전국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동양란을 생산한다는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앞으로 테마농원을 만들 계획”이라며 한 단계 도약할 복안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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