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우 교수

원정개요
1) 원정명 : 2009 인천대학교 [우리 모두 함께하는] 에베레스트 원정대
2) 대상지 : 네팔 히말라야 산맥 에베레스트봉(8천848m)-남동릉
3) 원정기간 : 2009년 3월 23일~5월 28일(68일간)
4) 주 최 : 인천대학교 산악부
5) 주 관 : 인천대학교, 인천대학교 총동문회
6) 참가인원 : 원정단장 김준우(지도교수) 등 7명
7) 등반목적 : 인천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 및 송도 신 캠퍼스 이전기념
           대학교 최초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8) 등반성과 : 2009년 5월 19일 오전 8시 30분 김동언·김종호 대원 정상 등정

 등반일정

   
 

 

 

 

 

 

 

 

등반대원

   
 

나는 산에 대해 잘 모른다. 인천대학 산악부를 맡기 전까지는 높은 산에 오른 적도 없었고 전문적으로 산행 기술을 배운 적도 없었다. 남들처럼 단지 주말을 이용해 집 근처 산행을 즐겨 했을 뿐이다. 지금부터 6년 전 산악부 지도교수였던 노영돈 교수가 밤늦게 찾아와 떠밀다시피 맡게 된 것이 산악부 지도교수 겸 7대륙 최고봉 원정대 단장이라는 직책 아닌 직책을 갖게 된 계기다. 실제 이를 맡을 때만 해도 에베레스트 원정은 고사하고 7대륙 최고봉 등정이라는 말조차 나에게는 생소했다.

  #  7개 봉 중 4개 봉 남겨두고 지도교수 맡아

7대륙 최고봉이라는 것은 세계의 7대륙에는 각기 최고봉이 있는데 전문 산악인 사이에는 이 7고봉을 오르는 일이 큰 명예로 인식돼 있다. 당시 국내 대학에서는 아직 이를 달성한 곳은 없었고 유일하게 인천대가 유럽의 엘부르즈와 북미의 맥킨리 봉, 남미의 아콩카구아를 이미 등정한 상태로 나머지 네 개의 봉을 남겨 놓고 있었다. 산악부 지도교수를 맡자마자 갑자기 떨어진 일은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 킬리만자로로 학생들을 인솔해 가는 일이었다. 출발까지는 불과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다른 원정대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학생들로만 구성돼 있는 해외 원정대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하나는 예산 확보와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학생대원들의 안전에 대한 것이다. 예산은 대학에서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할 수 없이 인천대학교 산악부 졸업생들의 약간씩 지원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었으나 학생들의 안전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입생들로 구성된 원정대를 학생들만 보내기는 나 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아 결국 지도교수인 나도 같이 가게 됐는데 책상머리만 하던 내가 해발 6천m를 젊은 학생들과 같이 오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이후 인천대 산악부는 큰 사고없이 성공적으로 오세아니아의 코지어스코, 남극의 빈슨매시프 등을 등정했다. 2008년 결국 중앙아시아의 에베레스트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에베레스트의 등정은 빈슨매시프의 등정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예컨대 빈슨매시프의 경우도 한 사람당 경비는 거의 4천만 원에 육박했다. 당시 빈슨매시프 원정에 대해 학교에서 엄청난 예산에 대해 회의가 있었으나 산악부는 대학본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학에서는 재학생 한 대원에 대해 일부 지원을 약속했고 산악부 자체 경비 부담으로 졸업생과 재학생 한 사람씩 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빈슨매시프 원정도 다행히 큰 사고가 없이 등정에 성공했다.

 # 에베레스트 원정대 조직 구성
 
그러나 문제는 에베레스트 원정에 대한 준비다. 에베레스트의 원정은 다른 원정과는 달리 많은 인원과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데 그 비용이 대략 3억 원 이상이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학 수준에서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또한 기한도 대략 두 달 이상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재학생인 경우 학교를 휴학할 수밖에 없고 일반인의 경우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일은 대원들의 결심을 얻는 길이었다.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만 대학 산악부의 대원들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예전과 달리 취업에 민감해져서 이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졸업생 역시 직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거의 두 달을 할애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인천대의 산악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졸업생 역시 많지 않고 이들 역시 사회적으로 아직은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원정을 권유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몇몇 산악부 졸업생들은 뜻은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주저하고 있었고 그 중 다소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몇 명 정도만이 적극적이었다. 나는 매우 초조했다. 남은 시일이 며칠 남지 않았고 또한 준비 및 훈련을 하려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일단 시작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원정 준비로 최소한 1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벌써 2008년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만약 2009년 3월 원정을 생각하면 이제 6개월도 안 남은 시점이다. 몇 번 모임을 통한 졸업생 설득 작업 끝에 졸업생 3명을 중심으로 겨우 원정대를 꾸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문제는 예산을 확보하는 일인데 마땅히 예산 출처가 없는 상태에서 엄청난 예산을 떠나기 전까지 확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더욱이 산악부 졸업생들에게 예산을 확보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 결국 모든 자금을 대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천대와 같이 그리 크지 않은 대학에서 일개 행사로 3억 원 이상의 예산을 책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원정대원들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나 역시 뾰족한 묘안은 없었다. 더구나 직장이 있는 졸업생 대원들에게 원정 훈련과 함께 스폰서 확보를 부탁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우리 원정을 알리는 일이 필요했다. 먼저 원정 발대식을 열면 언론에서 주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위로부터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2008년 10월 대한산악연맹 회장을 모시고 발대식을 이행했다. 사실 발대식은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학에서도 예산도 없는 상황에서 발대식은 너무 이르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할 수 없이 산악부가 주체가 돼 이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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