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여행을 다녀왔더니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 있다.
‘당분간 베란다에 둔 세탁기는 사용을 금해 주세요.’
기온이 영하 10℃를 넘는 맹추위가 계속되어 하수배관이 얼어 터졌나 보다 짐작만 하고 있는데, 반장 아주머니가 오셨다. 아래층 집에서 물난리가 났다며 봄이 올 때까지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는 전갈이다. 그러면서 5층 새댁네에서 불편을 참을 수 없으니 구정이 끝나면 상관 않고 세탁기를 쓸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신다.
배관을 뚫는 기사를 불렀는데 관 속에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 도저히 해동시킬 방도가 없다며 자꾸 건드리면 플라스틱 관이라 혹시 터질지도 모르니 영상으로 기온이 오를 때까지 조금만 참으라고 했단다. 이래저래 감정싸움으로 번진 1층과 5층 사람들은 서로 양보가 없었고 화가 난 아래층 집에서 물이 내려오는 배수관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러면 그 윗집이 또 물바다가 될 판이라며 어떡하면 좋을지 의논을 하셨다. 이해당사자인 2~4층 집이 모여 구정 연휴 첫날 오전에 5층 집 벨을 눌렀다. 한참 시간이 흐르도록 기척이 없더니 젊은 새댁이 문을 열고는 그간의 사정을 말한다. “하수관이 얼었다면 구청에 신고해서 해동을 하든지, 이물질로 막혀 있다면 뚫어야지 이런 불편이 말이 되느냐”며 또박또박 야무진 새댁이 반장 아주머니 말에 이의를 제기한다. “뉴스도 못 봤느냐. 강추위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생긴 자연현상인데 이해해야지, 안 그러면 기술자 불러 우리 모두 하수배관을 막아버리겠다. 그러면 그 물이 어디로 가겠느냐. 새댁 집 안으로 넘쳐흐른다.”
좀 유치하고 치사한 말들이 한참이나 오간 후에 결국 새댁은 빠른 해결을 바란다며 당분간 세탁기를 돌리지 않겠다고 타협을 했다. 타협안을 받아들고 내려오는데 반장 아주머니가 자기네 집에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모두를 불렀다. 거실에 앉아 공동생활에서 오는 자잘한 불평을 서로 털어놓는다. 조금씩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면 별일 아닌데 나 편하자고 하다보면 이웃에 피해를 주고 눈살 찌푸리는 일이 생겨나는 것 같다. 층간 소음, 재활용품 쌓아 놓는 것, 베란다 화분대에서 떨어지는 물 등등. 속에 담아두고 있던 불평을 털어놓고는 차 한 잔에 모두가 마음이 풀려 명절 잘 쇠고 좋은 일 많은 한 해가 되시라고 덕담을 나누며 일어섰다.

구정 연휴 마지막 날 오후에 문자가 왔다.
“하수관 뚫렸으니 세탁기 돌려도 됩니다.”
반장 아주머니가 보낸 문자다. 구정부터 기온이 올라가 낮 기온이 영상을 웃돌아 푸근해지면서 얼었던 하수관이 녹은 모양이다. 잠시만 내 이웃을 위해 참았더라면 서로 얼굴 붉히며 언쟁할 일이 없었을 텐데, 웃음이 나온다. 금방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냉랭하고 상대방이야 어찌됐던 내 불편을 참을 수 없다며 각을 세운 일이 쑥스러워진다. 날씨도 풀렸으니 마음도 해동이 되면 세상이 편안할 것 같다.
나그네 옷을 벗긴 쪽은 바람이 아니고 따뜻한 햇살이란 이솝우화가 멀리 있지 않다. 내 주변 이야기다. 영상의 기온이 하수관을 녹였듯이 따뜻한 배려가 이웃사촌을 만든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열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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