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실록 편찬에 대한 상식을 간단히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특히 어떤 기록이 실리는가를 알아보고 있다. 실록 편찬범례가 그걸 잘 보여 준다. 14조인데, 7조는 대간의 논계에 대한 내용이라 6조와 합쳐 소개했고, 12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번잡하고 쓸 데 없는 문자는 참작해 다듬어서 간결하고 압축적인 문장이 되도록 힘쓴다.”는 산삭(刪削·줄임)의 원칙이므로 제외하면, 모두 12조 항으로 실록에 넣을 기록을 지정해 놓았다. 계속 보자.

 임명, 과거합격자, 길흉, 시비
여덟째, 모든 관직 임명[除拜]의 경우 중요하지 않고 잡다한 관직이나 산직[冗散] 외에는 이조와 병조의 문서를 다시 살펴보아 상세히 기록했다. 중요 관직 임명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관들의 임명기록은 거의 실려 있다. 이게 왜 재미있느냐면, 사관은 봉교·대교·검열 등 정7품·정8품·정9품으로 관료 등급으로 보면 하급관리이다. 그러므로 하급관리는 홍문관 관원을 가끔 실록에 기록할 뿐 다른 관원은 꿈도 못 꾼다. 그러나 사관들은 자신들이 사초를 작성하고 실록편찬에 들어가기 때문에 하급관리임에도 실록에 등재됐다.

아홉째, 과거에 합격한 인원은 ‘아무개 등 몇 사람’이라고 적는다. 과거급제자도 적어야 하지만 적어도 33명이니까 장원 이름만 적고 나머지는 몇 사람이라는 정보만 기록한다는 것이다. 열 번째, 군병의 숫자, 경외의 호구 숫자를 기록한다. 국가가 생긴 뒤 그 국가를 유지하는 두 기둥은 군대와 세금이다. 그러므로 군인의 숫자와 세금을 낼 인구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또 이래서 실록이 비밀리에 보관됐는지도 모른다. 열한 번째, 조정의 길흉(吉凶) 등 여러 의례 중에서 나라의 헌장(憲章)에 관계돼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보여 줄 만한 것은 문장이 비록 번거롭고 잡다해도 기록했다. 열두 번째, 경외의 관리 출척(黜陟 쫓아냄)이나 공사(公私) 시비는 반드시 그 대략을 뽑아 기록했다.

 세 방으로 나누어
실록청이 설치되면 총 지위를 맡는 도청(都廳)과 3방이 구성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각 기록을 가져다 3방에 나눠 기록 추리기를 시작한다. 이를 산절(刪切)이라고 한다. 깎고 줄인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의견 조율이 필요하면 도청에서 조정한다.
이 과정이 지루하기도 하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실록 편찬은 1~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마쳐야 했기 때문에, 또 실록 편찬만을 위해 관원을 새로 뽑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문관 소속 사관, 즉 한림(翰林·붓을 든 사람이란 뜻)이라 불리던 봉교·대교·검열을 제외하면 전원 겸임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겸임관들은 각각 자기가 본래 관청에서 해야 할 일이 있게 마련이고, 본직의 승진이나 이동 같은 인사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실록청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록청에 임명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어서 묘지의 비석에 꼭 기록하는 관직이기는 했지만, 이렇듯 불가피한 어려움도 있었던 역할이었다.

이상의 산절 과정을 거치면서 나오는 산물이 초초(初草)와 중초(中草)였다. 초초본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중초본은 《광해군일기》 태백산본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교정 : 보고 또 보고
초초본, 중초본으로 교정을 보면 정초본(正草本)이 된다. 《광해군일기》 정족산본이 정초본이다. 역사가 이렇듯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원래 《광해군일기》의 편찬을 마치면 세초(洗草)를 해 비밀을 보장하고 재생지로 써야 하는데, 인조 초반 광해군 때 바닥난 재정 때문에 미처 간행을 못하고 사고(史庫)에 보관해 둔 것이 지금 우리가 중초본과 정초본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참고로 얼마 전 일본에서 반환된 오대산 사고 실록을 통해 실록의 교정 부호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글자 바꿈 : 붉은 글씨 또는 검은 글씨로 덧쓰거나 옆에 고쳐 씀
2. 글자 추가 : 붉은 점을 찍고 붉은 글씨로 삽입
3. 경사 세움 : 붉은 색으로 /표를 하거나 덧씀
4. 글자 세움 : 글자 옆에 붉은 점을 찍고 바로 써 넣음
5. 글자 뺌 : 빼야 할 글자 위에 ×, ○, --- 등으로 표시
6. 글자 붙임 : 빈 간격에 ---로 이어줌
7. 띄어쓰기 : 띄어야 하는 만큼 ○표를 삽입
8. 글자 뒤바뀜 : 위글자 옆에 下자를, 아래글자 옆에 上자를 붉은 색, 또는 검은 색으로 써 넣음
위의 8가지 교정 방법에 활자가 빠진 곳에는 써 넣는 방법, 즉 ‘掌○院’→‘掌樂院’, ‘罷○事’→‘罷榜事’ 등과 같이 교정하는 방법을 포함하면 9가지 교정 방법이 된다.

 백서(白書)도 만들고
당시 실록을 만들던 사람들이 얼마나 꼼꼼했느냐면 실록을 편찬하는 전 과정을 다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를 《실록청의궤》라고 한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번 얘기한 바 있는 《선조수정실록》의 편찬과정을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찬수청의궤》의 일부다.

○ 乙酉(인조 23년. 1645년) 9월 15일,
춘추관 낭청이 총재관의 의견이라며 아뢰기를, “지난번, 전염병을 피하여 역사를 수정하는 장소를 승문원에 두었는데, 이제 시강원(侍講院)이 옮겨왔습니다. 비변사 근처에는 따로 사용할 만한 건물이 없습니다

   
 
만, 전의감(典醫監)은 왕년에 찬수청을 옮겨 사업을 마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전례에 따라 사국(史局)을 옮겼으면 하는 의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알겠소. 서둘러 일을 마쳐야할 것이오.”라고 전교했다.

○ 丁酉(孝宗 8년. 1657) 2월 1일
홍문관에 보냄. 수송할 일. 이번에 실록을 수정할 때 고열하고자 하니, 『우계집(牛溪集)』 전질을 서둘러 수송할 것.

○ 丁酉(孝宗 8년. 1657) 5월 3일
서둘러 지급할[上下] 일. 총재관께서 분부하신 중에, 일을 맡은 모든 공장(工匠)들에게 단오일에 음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광목 3필과 쌀 2석을 조달할 것.

○ 丁酉(孝宗 8년. 1657) 2월 1일
감결. 총재관 이하 근무 상황을 표시하기(仕進井間) 위하여 저주지를 매달 2장씩 조달할 것. 호조·장흥고

○ 실제 들어간 물품[實入]
초주지(草注紙) 123권(卷), 백지(白紙) 25(卷), 백휴지(白休紙) 78권(卷), 휴지(休紙) 230근(斤) (78) 상묵(常墨) 30근(斤), 자작판(自作板) 12립(立) 반(半), 후지(厚紙) 6장(張), 백문석(白紋席) …

○ 도청낭청(都廳郎廳)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이정영(李正英) 정유(丁酉) 4월 29일 추가로 차출되어 계하. 같은 해 8월 18일 승지(承旨)로 임명됨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이정기(李廷夔) 정유(丁酉) 정월 13일 계하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은상(李殷相) 정유(丁酉) 4월 29일 추가로 차출되어 계하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안후열(安後說) 정유(丁酉) 정월 13일 계하

이렇듯 실록청의 사무실 이전에서부터 실록 편찬에 필요한 문집 등 자료의 수집, 실록청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먹을 음식 조달을 위한 공문, 실록청에서 사용할 기자재·비품·소모품 등의 조달을 위한 공문, 그리고 실제로 들어간 물품의 종류와 양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편찬에 참여한 인원의 임명 날짜, 근무일수까지 기록으로 남겼는데, 문신 관료뿐 아니라 기술자나 고지기의 숫자와 이름까지 기록했다. 과연 기록의 나라, 조선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계속>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