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자연은 생기를 속으로 뭉쳐서 최소한의 생명활동으로 에너지를 모은다. 소생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순천만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마른 공기를 가르며 겨울 진객이 오셨다. 흑두루미가 날아들면 순천만은 귀빈을 영접하느라고 조신하게 가슴을 풀어놓는다. 짧은 겨울 해가 시베리아를 에돌아 온 바람에 밀려 갈대밭에 포물선으로 떨어진다. 낙조로 붉어진 뻘에 새들이 내려앉고, 저물어가는 하늘에도 새떼가 적막을 깨운다.
갯벌에 물이 흘러 수많은 생명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도 사람들은 삶의 줄을 놓지 않는다. 혹한의 겨울, 순천만은 살아 있어 꼬막을 캐고 뻘을 헤집어 바구니를 채운다. 뻘은 휴지기도 없이 생명을 만들고 키우고 부정을 정화시킨다. 생에 대한 애착을 조개의 종피처럼 뻘 속에 뿌려 성실히 돌본다. 그래서 자전하는 지구를 돌아 시베리아를 건너 온 겨울 철새는 이곳에서 먹이를 얻고 힘을 얻어 신성한 에너지를 날개에 저장한다.
순천만의 뻘은 겨울 동안 침묵을 지킨다. 흘러들어온 나태와 증오와 무절제와 방탕을 침윤시켜 건강한 영혼으로 변화하고, 무방비로 넘쳐나는 자극적인 소음을 흡입해 소모적 논쟁을 종결시켜 봄을 초대할 준비를 한다. 때때로 침묵과 명상이 통성기도보다 훨씬 더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내 소리는 너에게 가 닿지 못하고, 무수한 소리들인 잡음에 묻혀 중간에서 소멸되고 만다. 이렇게 침묵은 겨울 뻘처럼 생명을 창조하는 자양분으로, 덕성을 수련하는 힘으로 작용해 동적인 에너지가 된다.
내 몸속의 뻘에도 겨울이 온다. 나는 이 겨울 동안 순천만에서 배운 지혜를 빌려와 소통의 부재로 갈등하는 일이 없도록 할 참이다. 진종일 네 생각으로 그리웠던 가슴의 그림자를 불러와 띄엄띄엄 해독해 서운했던 마음을 풀어주겠다. 너의 진심이 조금 늦게 배달되어도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고, 폭죽 터지듯 화려한 반응이 아니라도 기쁘게 받겠다. 가끔은 게으름도 즐길 것이고 콜타르처럼 끈끈하게 눌어붙은 불안도 떼어내 버리겠다.
갈대는 긴 세월 증식을 위한 준비로 느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정신적 이완의 시간이고 왕성을 위해 휴식한 시간이며 중심점을 찾는 관조의 시간이다. 갈대는 원래가 군락을 이루어 육상과 해양의 완충지대에서 가장 왕성하게 자란다. 크고 튼실한 밀생으로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태풍이나 해일이 연안으로 밀려올 때 그 에너지를 흡수해 자연재해를 순화시킨다. 순천만에 펼쳐진 30만 평의 거대한 갈대밭은 생태계 조절과 오염물의 정화뿐 아니라, 정서에도 도움을 주어 마음밭을 풍성하게 일구도록 해준다. 지혜로운 점은 자기 자신의 존재 유지를 위해 번식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모체의 개체유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뼛속을 비워낸 갈대들이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보행하는 내 발걸음도 안정을 찾아 갈대밭의 무수한 갈대처럼 수려해진다. 뻘 속에 박힌 뿌리 끝까지 산소를 공급하는 갈대처럼, 내 마음 깊은 심연에 신선한 과즙 같은 활력을 불어넣어 내 체액을 기쁨으로 채우겠다. 갈대는 순천만의 배경이 돼 활짝 핀 머리를 풀어 바람을 탄다. 일렁이는 물결이 열병식하는 군인들처럼 일사분란하다.
순천만의 겨울은 단순한 동면이 아니다. 4계절 돌고도는 순환이 예외 없어 낳고 자라 번식하고 숨쉬며 생을 사는 시간이다. 순천만에서 생의 순리를 배워온 시간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한참 나이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은 헛되이 흐르고 쓸모없이 쌓여지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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