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때 이미 수리를 마쳤던 창덕궁을 놓아 두고 광해군 원년 10월 궁궐 영건청(宮闕營建廳)에서는 창경궁 수리에 들어갔다. 거기에 필요한 목재·돌·철·기와 등은 전국에서 모았지만, 특히 하삼도(下三道)가 그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사간원의 직언대로 지금은 백성들이 쉴 때이지 궁궐공사를 벌여 전란에 시달렸던 민생을 다시 물불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될 터였다. 광해군 2년에도 새해 벽두부터 사헌부의 영건청 혁파 논계가 이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자전(慈殿)이 거처하는 궁은 미처 수리하지 못한 곳이 꽤 많으니 중도에서 그치기가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책방, 전갈당, 영화당…
사실 대내(大內·궁궐)의 전각(殿閣)들은 옛터에다 지어 규모가 전보다 줄어든 것도 아니었고, 단청(丹靑) 역시 옛날보다 훨씬 화려했다고 한다. 전란을 겪은 뒤라 나라의 형세도 떨치지 못하고 백성들 힘이 넉넉하지 못한 시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줄이고 절약해야 할 때였다. 더구나 재변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었고 변방의 후금(後金)에 대한 우려가 날마다 다급해지고 있었다. 또 중국 사신이 오게 돼 있었으니 그들을 접대할 물품도 걱정거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해군 원년에는 곡식이 영글지 않아 서울의 시장 물가가 극도로 오르는 바람에 쌀값이 금값과 같아져 백성들이 먹고살기가 어렵게 됐던 것이다.

양사에서만이 아니라, 홍문관에서도 궁궐 건축을 반대하고 나섰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교리(校理) 이준(李埈 1560년, 명종15∼1635년, 인조13)은 상소를 올려 창경궁을 비롯한 전각 공사를 반대했다. 급하지도 않은데 궁궐 밖 먼 데다 신책방(新冊房)·전갈당(全蝎堂)·영화당(暎花堂)·고수라각(古水剌閣)·독서당(讀書堂)·여휘당(麗輝堂)·통명전(通明殿)·환경당(歡慶堂)이라는 건물을 짓는데, 칸 수가 무려 수백 칸[礎]이라서 이는 종묘사직의 안위(安危)와 민심의 향배(向背)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창석선생문집(蒼石先生文集)》권7 〈영건을 중지하고 경연을 열기를 청하는 차자-경술년(1610년, 광해군2)[請罷營建開經筵箚-庚戌]〉).
 
   핑계 없는 무덤 없다
삼사(三司)의 반대가 심해지자 광해군은 뭔가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됐다. 광해군이 제시한 첫째 이유는 자전인 인목대비가 지금 행궁인 경운궁에 지내고 있기 때문에 자전이 살 창경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이미 완성된 창덕궁은 전우(殿宇)를 비록 그 전 제도대로 회복했으나 중랑(重廊)과 복각(複閣)이 답답하고 음침해서 한 곳도 환하게 소통된 곳이 없으며, 침전(寢殿)은 궁인들이 드나드는 곳과 멀지 않아 잡다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본래 심병이 있어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가장 싫어하므로 거처는 반드시 소통되고 확 트인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강이 좋고 병이 없을 때라면 비록 침전에 거처하더라도 혹 견디어 낼 수 있겠지만 마음과 몸이 편치 못할 때에 다시 한가하고 조용하게 병을 요양할 곳이 없기 때문에 신책방을 그 옛터에 따라서 짓게 했고, 그 규모를 조금 더 넓게 한 것은 병을 조섭하는 별당으로 삼고자 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환경전(歡慶殿)과 영화당(暎花堂)은 모두 짓지 말고 여론에 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사관이 전하는 사실은 이와 달랐다. 이 궁전들을 뒤에 다 지었다는 것이다. 또 별전(別殿) 두세 곳을 더 지어 널리 기이한 꽃과 이상한 나무와 괴이한 돌을 모아 정원을 가득 채웠고, 꽃과 돌 사이에 이따금 작은 정자를 지어 유람하는 곳을 갖춰 놓는 등 그 기교함과 사치스러움이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것들이었다고 했다.

사관의 말이 빈말이 아닌 것이 그해 3월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洪瑞鳳)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책방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목재 수송을 위해 인제 현감(麟蹄縣監) 이풍(李馮)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정하고 도감(都監)의 차관(差官)인 유결(兪潔)과 협동해 일시에 운송을 독촉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춘천(春川)의 재목 210조(條), 양구(楊口)의 141조, 영월(寧越)의 60조, 횡성(橫城)의 31조, 홍천(洪川)의 40조, 원주(原州)의 150조를 수로(水路)로 보냈고, 그 나머지 보내지 못한 목재는 뒤미처 계속해 보내도록 독촉했다.

   대동법을 가로막은 궁궐공사
조정에서 물러난 이원익을 대신해 그나마 대동법의 명맥을 이어가던 호조판서 황신(黃愼)은 영건청 제조(提調)를 겸하고 있었다. 그는 재목을 배정한 뒤에 영건청(營建廳)에 나와 바치는 미포(米布)를 제외하고 긴요하지 않은 공물(貢物)은 삭감해 값을 주도록 했으나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여러 사람을 동원시키는 것은 매일반이라며 궁궐공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우리가 전에 좌의정 기자헌 같은 세력가나 왕실 궁방의 방납(防納) 이익과 그에 동조하는 광해군 때문에 대동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황신의 말을 보면 궁궐공사 역시 대동법을 저해한 주요 원인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우선 인적 차출이 문제였다. 대동법은 조선정부의 세제(稅制)를 혁신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에 전력해도 성패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그 총지휘를 맡은 황신이 영건청 일을 함께 보고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궁궐공사를 통해 대규모 재정 변동이 생길 경우 양전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공물 계량이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대동법 실시는 그 기초수량조차에서부터 불가능해진 것이다. 광해군 때 실시된 경기 대동법이 내내 지지부진한 이유는 대동법을 실시했을 때 부담해야 할 세액을 궁궐공사로 인한 백성들의 추가 부담액이 늘어남에 따라 제대로 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격려도 하고, 상도 주고…
황신의 하소연에도 광해군의 대답은 여일(如一)했다.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재목은 영건청에서 상세히 마련하고 남는 숫자는 헤아려 삭감하라는, 대책이라고 볼 수 없는 지시만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영건청(營建廳)의 전후 도제조·제조·도청(都廳) 이하 공장(工匠)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근무일수와 얼마나 공로가 있는지를 등급별로 분류해 상세히 서계(書啓)하라고 챙겼다. 실제로 영건청 당상(永寧殿移安廳營建廳堂上) 김영남(金穎男)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 윤휘(尹暉)에게 아마(兒馬) 1필 등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또 열심히 광해군의 정책기조에 동조하는 관료도 있었다. 광해군 4년 황해 감사 유몽인(柳夢寅)은 쇠붙이를 별도로 마련한 수량이 무려 4만 근이나 되고 소금은 1천 석이나 됐다. 영건청에 따르면

   
 
이는 여러 도의 감사 중에서 으뜸이었다. 어찌 가상하지 않겠는가? 광해군은 유몽인을 가자(加資)해 줬다. 낭청(郎廳)들에게 수시로 상을 줬음은 물론이다. 결국 유몽인이 철 4만 근, 소금 1천 근을 별도로 모으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평안 감사 김신국(金藎國)도 숙마(熟馬) 1필을 상으로 받았다. 별도로 베 1천여 필, 쌀과 콩이 무려 1천여 석을 더 보냈기 때문이었다. 사관은 “서쪽 변방은 또 사신을 접대하고 군량을 지원하고 있으므로 비록 조금 거두어서 절약해 쓰더라도 백성들의 힘이 지탱하기 어려울까 염려되는데, 더군다나 원래 정한 이외에 또 1천 필의 베와 1천 석의 쌀을 더 냈다는 말인가. 백성들의 살을 깎아내고 백성들의 골수를 빼내어 혼미한 임금의 총애를 굳히려고 꾀했으니 그 죄가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악에 그칠 뿐만이 아니다”라고 꾸짖었다.

 
     사정하는 평안 감사
그러나 그도 곧 상황을 모면하려고 애를 썼다. 곧 평안도는 호조로부터 포는 매 필당 쌀 17두, 노비신공은 매 필당 작미(作米) 30두를 분정받았다. 전체 양은 본도 연해 지역의 각 고을에서 쌀·콩·벼를 합해 3만 석을 얼음이 풀리면 즉시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해 평안도의 농사가 조금 잘 됐다고는 하나 눈보라와 이른 서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태반이었다. 해안의 각 고을에서 납부해야 할 쌀·콩·벼가 2만 석 이상이고 노비신공 명주를 작미한 것도 1만2천여 석이며 선수청(繕修廳) 작미도 1만여 석이나 되는데, 정작 해안 고을의 전안(田案)은 4만여 결에 불과했다. 4만여 결의 땅에서, 더구나 큰 흉년이 든 해에 5만 석의 엄청난 곡식을 마련해 내자면 그 지역의 소출을 닥닥 긁어 내더라도 징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분정한 가격도 합리적이지 않았다. 당시 삼값 포의 시장 가격은 한 필에 단지 5, 6두인데 지금 15두(17두)를 요구했고 노비신공의 명주도 필당 15두에 불과한 데 30두를 내라고 했던 것이다. 과다 책정인 셈이다. 결국 광해군이 명령한 쌀·콩·벼 3만 석은 아무리 종자와 양식을 생각하지 않고 한양으로 보내려고 해도 못할 판이었다. 결국 김신국은 중국으로 사신이 다니는 길목이라는 특수성을 들어 백성들이 무너져 흩어지는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한 해가 지나도록 김신국은 목표량의 반밖에 올려 보내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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