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살포시 잠이 들었다. 온통 노란빛으로 화사한 산수유 꽃밭에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여인. 몽환의 노란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부드러운 봄 햇살에 웃음이 간질간질 터진다.
산수유 축제 마지막 날 주말인데 만개는 아직 일러 활짝 핀 꽃을 볼 수 없다. 수줍은 봄처녀 자태로 상춘객의 마음을 잡아끄는 꽃가지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즐거운 표정이 풍선처럼 부풀고 봄 햇살에 포근해진 마음은 심술부리는 바람까지 보듬는다. 남은 기운을 쏟아내는 바람은 제법 기운이 쎄, 모자를 날리고 천막을 휘둘리게 하면서 존재를 과시하지만 개구쟁이 아이의 장난 같아 모두들 재미있어 했다.

봄꽃 축제를 알리는 행사들이 남도를 시작으로 북진하면서 조만간 삼천리 방방곡곡을 꽃대궐로 만들 것이다. 올해는 늦추위가 있어 축제를 계획하는 주최 측을 당황스럽게 했다. 개화 시기를 정확하게 점치지 못해 애를 태우게 하더니 결국 겨우 꽃봉오리를 부풀리는 꽃나무 밑에서 축제를 열게 만들었다.

주말에 두 곳의 봄꽃 축제장을 다녀왔다. 매화 축제장과 산수유 축제장이다. 매화 축제는 시작하는 곳이라 축사를 하는 분과 동행을 했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산수유 축제는 행사 마지막 날이라 해서 들렀다. 두 곳 다 만개한 꽃을 보지 못했다. 매화는 이제 꽃봉오리를 부풀리는 중이고 피기 시작한 산수유는 수줍은 처녀처럼 꽃잎을 살짝 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뽕짝 노래에 흥겨워하고 추억의 먹을거리에 행복해하면서, 피어날 꽃잎을 가슴으로 보고 천진한 마음으로 봄나들이를 즐긴 주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소개 받았다. ‘화백님’이란 호칭에 수줍어하는 그녀는 오래된 술과 약초로 만든 발효차를 대접했다. 오래 묵어 깊은 맛이 우러나는 향을 음미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화실 곳곳에 놓인 그림과 소품의 조각과 다기들이 격이 있는 그곳은 넓은 통창과 낮은 지붕으로 자연에 동화된 아담한 구조로 방문객을 편하게 했다. 사철 변하는 자연을 느낌까지 화폭에 담고 싶어 한밤중에 매화꽃을 보러 가고 산수유를 보고 오면서, 어떤 날은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달빛 고고한 밤을 보낸다고 했다. ‘논물 받아놓은 논에 비친 달을 본 적 있느냐. 전율이 올 정도로 아름답다. 그 느낌을 온전히 화폭에 담고 싶은데 만족스럽지 못한 붓질에 불면이 된다’며 술잔을 비운다.

그녀가 담근 수십 년 된 솔잎주를 엄지손톱만한 눈물잔에 따라 마시며 사는 이야기로 짧은 봄밤을 새웠다. 마음 통하는 벗이 오면 내온다는 그녀의 오래 묵은 고진감래주들이 내 오감을 호사스럽게 했다. 돈이 생기면 앞뒤 재보지 않고 사 모았다는 명품 잔들은 크기도 모양도 달랐고 용도도 달랐다. 그냥 술잔이, 그냥 찻잔이 아니라 그녀의 혼이, 그녀의 기가 들어있는 잔이다. 처음 본 나에게 애지중지하는 잔을 내오고 긴 세월 익혀둔 술을 내오고 기꺼이 안방을 내준 그녀가 고마웠다.
꽃축제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가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만개보다는 피어날 봉오리를 가슴에 담아두자 했다. 세상사는 것이 잠깐의 활짝으로 눈부신 것보다는 꽃대를 밀어올리고 꽃눈을 만드는 과정이 더 오래임을 알 만한 세월을 살았다. 밤과 낮의 풍광을 새겨 연륜을 만들어 왔을 그녀의 내공이 아름답다.

삶의 축제는 우리가 마음에 등불을 켜는 것일 테다. 혹한을 이겨내고 피어난 봄꽃을 모셔 축제의 주인공으로 추대하는 것처럼 그녀의 고단했던 과거도 인꽃[人꽃]으로 피어 주위를 밝히는 주인공이 되었다. 찾아온 길손에게 즐거이 축제에 동참하게 해 준 그녀가 고맙다. 잠시 황홀한 만개보다는 저고리고름 풀어가며 열어주는 그녀의 꽃봉오리를 아껴가며 이 인연을 줄길 참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