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광해군대 궁궐공사를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대 후금 관계로 넘어가는 편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내치와 외치의 문제를 고민하기 좋고, 또 그간 광해군대의 업적으로 평가되던 외교관계의 실제를 바로 검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보아 광해군대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위 후부터 광해군 5년(1613)까지, 광해군 5년에서 광해군 9~10년까지 그리고 그 나머지 기간이 그것이다. 그래서 몰락기인 제3기로 가기 전에 나타났던 현상은 정리하고 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폐모론(廢母論), 북인 내부의 균열과 이탈을 먼저 다루고 파병을 비롯한 외교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것이 능동적 중립외교인지, 무원칙한 기회주의였는지 그때 판단하기로 하자.

   폐모론의 출발

   
 

시호가 인목(仁穆)인 왕대비 김씨는 연안(延安)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선조 35년(1602) 나이 19세에 선조와 혼인해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낳았다. 광해군의 즉위 이래 불안했던 정세는 광해군 5년 계축옥사를 계기로 현실로 나타났다.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사사(賜死)한 뒤 조정에서는 인목대비를 내쫓자는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됐다. 5월에 진사(進士) 이위경(李偉卿)은 “모후(母后)가 안으로는 무고(巫蠱·푸닥거리로 저주함)하는 짓을 저지르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였으니 어미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고, 왕자가 역적에게 추대되는 등 그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동기의 정도 자연히 끊어진 것입니다.”라며 폐모론의 물꼬를 텄다. 이 논리는 폐모론의 골격을 이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뒤에도 간헐적으로 폐모론이 제기됐지만 본격적으로 폐모론이 시작된 것은 광해군 9년에 이르러서였다. 성균관을 필두로 조직적인 상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서 여론 조작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는 사태가 이어졌다. 《광해군일기》에도 실려 있지만 좀 더 상세한 기록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실려 있다. 원래 《추안급국안》은 반역사건 정도에 해당되는 옥사를 다룬 심문기록이므로 수의나 상소가 실릴 성격의 사료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폐모론을 역옥과 같은 수준의 범죄로 보고 그에 대한 사료를 《추안급국안》에 수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의(收議)와 흉소(凶疎)의 실제
《추안급국안》에 폐모론은 ‘수의(收議)’, ‘흉소(凶疏)’라는 편목에 실려 있다. 이들 자료에 보면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여 명에다가 서울 여기저기 사는 동네 사람들, 노인, 역관, 상인, 의관, 서리 등에 이르기까지 왕대비를 폐위시키는 데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과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는 한 조선시대 최대의 여론 수렴이었다. 폐모에 대한 의견 수렴 사례를 들어보자. 이런 형식으로 돼 있다.

○ 풍릉수(豊陵守) 이혼(李混)의 의견. “서궁(西宮·왕대비)이 종묘사직에 죄를 지은 일은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는 바입니다. 빨리 묘당(廟堂)에서 의논하고 처리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일입니다.”
○ 이항복(李恒福)의 의견. “신(臣)은 8월 9일에 호되게 중풍(中風)에 걸려 몸은 죽지 않았으나 정신과 기력은 이미 탈진한[脫] 상태입니다. 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주상을 그리워하면서, 분수에 맞게 죽음을 결심한지도 지금 거의 반년이 되었지만 아직 병석에 있습니다. 모든 공무에 대해 대답하여 올리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 문제는 나라의 큰일이니 남은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병을 핑계대고 잠자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를 위하여 이 계획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과 아버지에게는 요(堯)임금와 순(舜)임금의 도리가 아니면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바로 옛날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순임금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사나운 어미가 항상 순임금을 죽이고자 하여 우물을 파게 하고는 흙으로 덮었으며 창고 지붕을 수리하게 하고는 밑에서 불을 질렀으니 그들의 위해와 반역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순임금은 울부짖으면서 부모의 사랑을 얻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부모를 그리워했을 뿐, 부모에게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진실로 아비가 설사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아들은 어미를 원수로 삼아서는 안된다.[子無讐母]’고 했습니다. 더구나 ‘급(伋)의 아내라면 백(白)의 어머니이다[伋也妻者, 是爲白也母]’(급은 자사의 이름이고, 백은 자사의 아들인 자상의 이름이다.《예기(禮記)》〈단궁상(檀弓上)〉)라고 했으니, 참으로 효성이 중요한 일입니다. 어찌 다른 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마땅히 효도로 나라를 다스려야 온 나라 안이 앞으로 점차 감화될 희망이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말들이 전하의 귀에 들어가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해야 할 길은 순임금의 덕을 본받아 효성을 무럭무럭 키우고 노여움을 돌려 자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저의 바람입니다. 주상께서 판단하십시오.”

   서궁(西宮)과 대비(大妃)
위에서 이혼은 폐모론에 찬성했고, 이항복은 반대한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이런 형식의 수의(收議)를 통해 사람들마다 의견을 내도록 했다. 오윤겸(吳允謙) 등 조정에 남아 있던 극히 소수의 관료들만 반대 의견을 냈고, 대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 광해군을 재평가하려는 분들이 왜 이런 사료를 그냥 두는지 의아하기 그지없다.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고 평가한 김에 이미 국민의 의견을 들어 정치에 반영하려고 했던 민주주의의 선구자라고 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위의 자료에 나오는 ‘서궁’은 곧 경운궁(慶運宮)이다. 폐모론이 시작되면서 왕대비 김씨에게는 ‘대비(大妃)’라는 표현이 아닌 ‘서궁’이라는 명칭이 쓰인다. 원래 1615년(광해군 7) 4월 2일(무인)에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광해군도 대비와 같은 서궁에 있었다. 이후 이곳에 가승지(假承旨) 등을 두고 인목대비가 홀로 사용해 오다가 유폐된 것이다. 그리고 인목대비가 공식으로 ‘서궁’으로 낮춰지는 것은 약 석 달 뒤인 1618년(광해군 10) 1월 30일의 일이다.

   수의 당상관 245명
위의 방식으로 의견을 거둬들였을 때 찬반이 나뉘었고 이어 정청(庭請), 즉 궁궐 뜰에 나가 폐모를 받아

   
 
들이라고 청한 사람 중 당상관만 245명이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38명이었다. 약 85%가 살기 위해 또는 당파적 이해를 위해 폐모론을 찬성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광해군 10년(1608) 2월 9일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던 당상관을 초계(抄啓 뽑아 보고함)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정창연·유근·김상용·이정귀·김권(金權)·신식(申湜)·오윤겸·구성(具宬)·윤방·조응록(趙應祿)·김위(金渭)·이시발(李時發)·박동선(朴東善)·성진선(成晉善)·신익성(申翊聖)·정효성(鄭孝成)·박미(朴 삼水변彌)·홍우경(洪友敬)·박안세(朴安世)·이시언·권희(權憘)·유적·오백령(吳百齡)·김류(金 流아래玉)·윤홍(尹鴻)·윤응삼(尹應三)·정사서(鄭思緖)·이계남(李桂男)·정호신(鄭好信)·이상준(李尙俊)·권극정(權克正)·강인(姜絪)·이사공(李士恭)·김경생(金慶生)·정승서(鄭承緖)·이상(李祥)과 입번(入番)한 이희(李憘)와 김현성(金玄成).
이어 광해군은 20일(경술)에도 “조신(朝臣) 가운데 누락된 자들을 상세히 살펴 아뢰라.”고 분부해 승정원에서 결과를 보고했으며, 3월 12일에도 양사(兩司)에서 정청에 불참한 백관, 종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논계가 올라왔다. 광해군은 침을 맞고 조용히 조섭하겠다면서 삼사(三司,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계사와 차자를 정지하고 잡다한 공사(公事)를 정원은 들이지 말라고 명했지만 폐모(廢母)에 관계된 소만은 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상관 중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숫자에는 허수가 있었다. 38명 가운데에는 실제로 병에 걸려 죽게 됐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예컨대 박안세·성진선·구성·홍우경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사관은 “죽기로 맹세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키며 시종일관 불참한 자들에 대해서는 위에 이미 기록했다. 당시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하리(下吏)가 참여했다고 써 넣은 것을 그대로 인정해 받아들인 자도 있었고, 실제로는 참여했으면서 스스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마 참여했으면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자기비판한 사람들일 것이다. 사관은 그래서인지 “박동선과 권희 같은 이들은 우뚝하게 홀로 선 자들이라 하겠다.”고 특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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