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모임을 이어온 친구 넷이 하루 여행을 갔다. 아흔아홉 고비 인생사라는데 지금 힘들게 깔딱 고개를 오르고 있는 친구를 위로할 겸 떠나온 자리다.
비는 물안개처럼 흐르고 숲은 싱그러웠다. 숲속 쉼터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피톤치드 샤워를 했다. 아줌마들답게 오물조물 싸 온 간식거리가 비오는 날의 별미가 되어 맛났다. 살짝 허전한 속을 채워주는 음식과 향 좋은 차는 마음을 너그럽게 해 한나절 세상의 번잡을 던져두고 비에 젖은 숲의 평온을 즐겼다.

후드득 빗줄기가 굵어지면 우산을 펴고 그치면 하늘을 올려다봤다. 운무가 퍼져올라가는 산등성이를 보며 가슴속의 불편 덩어리를 함께 품어가라 객쩍은 기원도 했다. 따져보면 허술하고 유치한 요구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일사분란 질서를 잡아주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힐링의 전성시대인 것 같다. 텔레비전을 켜도 힐링, 서점에도 눈에 잘 띄는 자리에는 힐링을 다룬 책, 여행도 힐링, 상담치료도 힐링센터. 스포츠도 힐링. 우리 모두는 만성증세에 시달리는 환자들이라 명의를 자처한 이들이 도처에서 손짓을 하고 있다. 묘책을 알려주겠다는 치료사가 포진해있는데 왜 몸도 마음도 상쾌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끊임없이 물어오는 질문에 현답을 내려줄 힐링을 어디 가서 받아야 명쾌할까.
몸보다 마음이 약한 모양이다. 몸의 상처는 아물고 낫고 나면 별다른 이상이 없다. 마음은 아니다. 마음은 여리고 여려 상처도 쉽게 받고 복원도 어렵다. 그런데도 마음은 함부로 다루어지고 치료에 성의를 내지도 않는다. 마음의 상처는 층층이 잠복해 있다가 사소한 자극에 폭발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하찮고 일상적인 일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상처가 된다.
돌아오는 길에 이름을 잘 짓는다는 작명가를 만났다. 친구는 자기와 남편, 딸의 사주를 보고 나쁜 사주를 액막이 해 줄 이름을 짓고자 새 이름을 부탁했다. 태어난 월·일·시까지 바꿔 가장 좋은 날을 알려줄 테니 생일을 차려 먹어라는 말이 의아했지만 친구는 진지했다. 그 사람은 고액의 작명료가 유명세를 증명해준다는 논리로 친구를 유도했고 이름을 바꾸지 않아 불행이 덮친 사례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다행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친구는 작명료가 부담스럽지 않았고 절에 거액의 시주를 한 적도 있어 솔깃해하는 눈치였다.

치유는 어디서 받아야 가장 효과적일까로 대화가 이어졌다. 차 안에서 넷이 나눈 대화는 조금씩 가닥을 잡아갔다. 눈여겨 보면 기뻐할 일이 내 일상에 얼마나 많은지 놀라게 된다. 살고 있는 곳에서 먼 지역으로 가야 여행이라고 착각하듯이 내 주변 내 일상을 촘촘히 들여다보면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고마운 것으로 가득한데 먼 곳 어딘가에 감탄할 무엇이 있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힐링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데도 치유가 제대로 된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은 수용성의 문제인 것 같다. 기대감이 없이 습관으로 무의미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마음에 치유가 자리 잡기는 어렵겠다. 친구는 평균 눈높이에서 보면 많이 가진 인생이다. 백을 가져야하는데 팔십은 지옥이다. 친구에겐 못 가진 이십이 가진 팔십보다 엄청나 마음을 갉아 된다.

친구에게 덤터기 씌우고 나는 아닌 척 하는 것도 반칙이다. 친구의 욕구가 더 간절했을 뿐이지 나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게 여긴 소유가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치유의 능력이 생겨나고 자리 잡을 여유가 만들어지겠다. 신경질적인 불평이 기쁨의 소리가 될 수 있으면 오늘 하루 특별한 힐링 여행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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