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10년은 인목대비의 폐위가 마무리된 뒤 북인의 내부 균열이 가속화된 시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허균의 옥사로, 허균이 이이첨 세력에게 밀려 죽임을 당한 일이다. 허균은 ‘홍길동전’이라는 고전소설로 알려진 바로 그 인물이다. 허균은 계축옥사는 물론 폐모론 때도 권신 이이첨과 같이 보조를 맞추어 왔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폐모론 때 이이첨의 입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문득 허균의 작품과 인생 사이에 간극은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허균과 기자헌의 대립
사건은 경운궁으로 허균이 화살에 글을 매어 쏘아

   
 
보냈다고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지적했던 데서 시작되었다. 광해군 9년 2월 인목대비가 있던 경운궁에 누가 투서를 한 일이었다. 그리고 폐모론 때문에 수면에 가라앉아 있다가 폐모론의 가닥이 잡힌 광해군 9년 12월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허균이 김제남과 연계되었다고 고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점화되었다.

기준격은 허균이 이이첨은 곧 패망하리라고 말했고, 자신이 “전에는 대비가 수렴청정하도록 하고 의(영창대군)를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다가 지금은 어찌 대비를 폐하자고 말하는가?”라고 하니, “말세 사람은 화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허균의 죄를 청했다. 양측의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광해군 10년 5월 허균 역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 변명하고 아울러 기준격, 기자헌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 세세한 상황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거니와 이 사건은 기준격이나 허균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도 내내 감춘 셈이므로 양측 모두 혐의를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박을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허균의 상소로 사건이 표면화되자 양사에서는 연계(連啓·잇따라 보고를 올림)를 올렸다. “기준격의 상소를 보면 못할 말 없이 허균의 악행을 드러내 놓았고, 민인길(閔仁佶)의 소를 보면 서궁(西宮)의 묶인 화살의 변고는 허균의 짓이라고 분명히 지적했으니, 엄히 국문해 밝혀내지 않는 한 기준격과 민인길과 허균 등은 하루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나국(拿鞫·잡아다 국문함)을 명한 뒤 죄인을 잡아내 국가의 형전(刑典)을 바루소서.”

     광해군의 중재
광해군은 사건이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합사까지 하면서 꼭 귀찮게 할 일이 아니다. 허균 등의 일도 그렇다.”고 입을 닫았다. 여론이 비등해지자 광해군은 그해 8월 기준격과 허균의 상소를 추국청에 내려 의논하게 했다. 추국청에서는 둘을 국문하지 않는 한 사안을 판단할 수 없다고 보고했고, 그 보고에 따라 정국(庭鞫·궁궐 뜰에서 열린 추국)이 열려 그들에게서 진술서를 받았다.

진술서를 받는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다. 진술서에서도 그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결국 대질심문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심상치 않은 비밀 계사가 삼사(三司)에서 올라왔고, 광해군은 그에 대한 비답도 봉해 내렸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때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僧軍)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해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했는데 왕도 이미 허락했다. 그런데 삼창(三昌·이이첨·박승종·유희분으로 광해군과 혼인으로 연결된 척신들)의 집에서 그 반란의 상황을 염탐해 알아내고는 허균이 대론(곧 폐모론)을 가탁해 남몰래 불궤(不軌·반역)를 도모한다고 밀계를 올리니 왕이 크게 놀라 마침내 기준격 등의 상소를 추국청에 내려서 마치 이전의 일을 캐묻는 것처럼 한 것이다. 그러자 삼사에서는 또 허균이 반역을 도모한 정상을 아뢰고 아울러 소를 올린 유생을 다스리기를 청했으므로 이에 사방으로 체포하러 나간 것이다. 대개 허균이 이미 이이첨과 대론(大論)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데다가 이이첨은 또 허균이 필경은 불궤를 꾀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마침내 유(柳)·박(朴)과 함께 같은 내용으로 고변을 해 그 입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가능하지 않은 혐의
허균이 김제남-인목대비와 연대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끝까지 이이첨과 마찬가지로 폐모론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폐모론을 거치면서 삼창 세력과 대립했고, 그 결과 권력투쟁에서 패한 것으로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이날 삼사 보고 이후 바로 허균을 ‘역적 허균[賊均]’이라고 불러 혐의를 기정사실화했다. 동시에 허균의 일파인 하인준(河仁浚), 황정필(黃廷弼)에 대한 심문을 급히 마무리했다. 형문이 가혹해 한두 차례의 형신에도 죽어나갔는데, 이이첨이 옥사를 완결짓기 위해 그리했다고 한다.

8월 24일에는 광해군이 직접 인정문에서 국문을 했는데, 광해군이 이이첨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해 “속히 정형을 해야겠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물어본 뒤에 정형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는데도 이이첨은 “도당들이 모두 승복했으니 달리 물어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죄인을 이에 잡아내어 도성의 백성들이 기뻐 날뛰고 있으니, 즉시 정형을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지연시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답답하게 여길 것입니다. 무슨 다시 물어볼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이들에 대한 처형을 독촉했다. 광해군은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군기시에서 사라지다
사관의 말에 따르면 이때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이 허균과 김개를 다시 국문하게 되면 자신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주륙(誅戮·벌을 줘 죽임)을 받게 될까 두려워했다고 했다. 친국을 통해 광해군이 정상을 캐물으려고 하자 이첨의 무리들은 황황히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 당류들과 더불어 탑전에서 정상을 막고 은폐하며 같은 말로 협박하고 쟁론해 광해군이 다시 캐묻지 못하게 했다. 이이첨은 또 허균과 친했던 김응진(金應珍)과 허균의 종 석을한(石乙漢)도 군기시(軍器寺)에서 추국해 입을 막고자 했다.

   
 
허균과 다퉜던 기자헌조차도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結案·최종판결문)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했다고 한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유배로 마무리돼 허균과 비교할 때 공정하지 못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광해군 12년 4월 미루고 미루다 광해군은 허균(許筠)을 토평(討平)한 일로 ‘예철장경장헌순정(睿哲莊敬章憲順靖)’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불안한 북쪽 정세
내정(內政)이 어수선한 가운데 북쪽 정세가 불안해졌고,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알려진 대로 처음 명나라에서 파병 요청이 왔을 때 광해군은 파병에 반대했다. 명의 요청이 “아직 황제 칙서가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내 광해군의 정책을 후원했던 이이첨도 이 사안과 관련해서는 광해군과 의견이 달랐다. 광해군은 ‘국내의 형편’을 들어 파병을 미루든지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파병할 때도 이런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조선이 억지로 참전한 것이며, 후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밀지를 내렸다는 설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한 점을 보면 밀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전쟁에 임하는 광해군의 태도는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강홍립에게 내린 이 하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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