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효성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호평을 받은 영화에는 대개 독특한 개성이나 탁월한 연기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조연배우가 있다.

흡입력이 강해 한순간에 존재감을 각인하는 이 배우는 때로는 주연배우보다 더 주목을 받는다.

말 그대로 미친 존재감으로 자신을 알린다. 이런 경우를 ‘신 스틸러’라 하는데 직역하면 ‘장면을 훔치는 사람’이다.

잠깐의 등장으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당연히 내가 주연이고 다른 이의 인생에서는 조연이 분명하다.

역할의 경중이 있어서 오래 등장하더라도 미미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잠깐 등장하더라도 강렬한 영향을 주는 이가 될 수도 있다.

후자가 신 스틸러가 되겠다.

누군가의 인생에 신 스틸러가 될 수 있다면 이것도 예사롭지 않다. 단, 그 사람의 인생에 긍정의 기를 불어넣어주는 신 스틸러가 되어야 한다.

내 인생에서도 신 스틸러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로 다가와 내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내 인생의 신 스틸러이다. 그분의 영향으로 내가 더 성숙해지는 기회가 된다면 참으로 귀한 인연이 되겠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매 번 의미심장할 수는 없지만 특별한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내게도 있다.

어느 해 초여름 산행길에서 만났던 할머니 한 분이 있다. 나무늘보라는 애칭이 말해주듯 운동신경이 둔한 편인 나는 일행과 떨어져 혼자 산을 오르고 있었다. 경사진 등산로에서 누군가가 내가 맨 배낭을 뒤에서 밀어주었다.

‘쉬엄쉬엄 올라가요. 먼저 올라간 놈이나 나중 올라간 놈이나 어차피 내려와야 할 길 아니우.’ 뒤쳐진 거리를 만회하려고 바둥바둥 애쓰는 내게 그분 말이 위로가 되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고운 모습이었지만 말을 참 재미있게 해서 몇 마디 말에 웃음이 났다. 오로지 정상 점령이 목표라 좁은 등산로에서 꾸물거리는 내가 장애물이었을 등산객들이 나를 앞질러 가면 등산로 가장자리로 자의반 타의반 밀려나곤 했다.

‘우리 여기서 좀 쉬다 갑시다.’ 휘어진 산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쉬기에 적당한 바위가 보였다. 일행을 놓친 나는 조급증이 ‘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할머니 왈, ‘깔딱고개 오르려면 이 다리 힘으로 되겄수. 발통에 축지법 붙여 줄 테니 좀 앉아 봐요.’ 못 이기는 척 잡아끄는 할머니 손을 잡고 에라 모르겠다 쉬어가자, 배낭을 벗어놓고 등산화도 벗고 벌렁 누었다.

‘내 나이가 몇이나 돼 보이우? 인생 흘러흘러 제자리 돌아온 환갑에서 5년이 지났으니 이제 겨우 다섯 살이요.’ 녹록지 않은 내공이 신산했을 할머니 삶을 대변한다.

한참을 봐야 속을 여는 낯가림이 있어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마음을 나누면 깊은 인연으로 오래가는 내 성격상 할머니와는 참 별종의 첫 만남인 셈이다.

누구한테도 꿀릴 것 없이 의무 다하며 살았다는 할머니는 꽃다운 18살에 아버지뻘 남자 재취로 들어갔다 한다.

온갖 우여곡절이 60부작 대하 드라마였고, ‘환갑인 생일날 문득 돌아보니 인생 참 별거 아니더라’며 할머니가 무심한 척 던진 ‘홍어X 같더라’는 말에 싸한 아픔이 왔다.

당시 나도 몇 해를 가슴 쓰리게 아픈 때였는지라 할머니가 따라주는 막걸리 잔에 설움이 터져 나와 훌쩍거리며 눈물을 쏟았다.

가슴에 단단하게 맺힌 응어리를 풀어낼 멍석을 깔아준 그분이 지금도 생각하면 여전히 고맙고 그날 그 시간이 운명같이 생각된다.

일행에게 피해 줄까봐 변명을 만들어가며 앞세워 보냈던 내 결벽증이 누그러지고 세상을 편하게 대하도록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손톱 만한 피해라도 줄까봐 왜 그리 전전긍긍했을까. 오히려 까칠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반성이 들었다.

막걸리 한 병을 나눠 마시고 할머니와 함께 한 짧은 한나절이 내겐 엄청난 생각의 전환점이 되었고, 고운 외모에 반전의 말솜씨를 가진 할머니는 내 삶의 신 스틸러로 고마운 분이 되었다.

내가 알든 모르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 스틸러가 되었을 수도, 앞으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삶은 서로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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