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던 날 업무 관계로 여러 해 알게 된 분과 오붓하게 차를 마셨다. 단독주택이라 마당이 한적한 그분 댁에서 저녁까지 먹고 하루를 잘 보내고 왔다.

약속을 하고 방문할 때는 차 한 잔 마시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비 내리는 뜰을 내다보며 마음이 천진해져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그분은 남편과 사업을 해 왔다. 초창기 터 잡을 때는 남편 혼자 고생을 했고 사업이 번창하면서 회사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순풍에 돛단배처럼 사업은 승승장구 커 나갔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 오십이 넘었다며 이제는 쉬고 싶다 한다.

문제는 그분의 성격과 말투인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지시하는 말투와 깔끔한 단어 선택이 엮여 상대방을 주눅 들게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 회사 대표인 남편과 업무관계로 처리할 일이 있어 내방한 회사 접견실에서 그분과 첫 대면을 했다.

알고 보니 경영의 실세였고 회사 내에서의 파워도 막강했다. 회사대표와 체결한 건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제된 사안이라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다. 다짜고짜 강한 질책을 거침없이 퍼부어 그 자리가 불편했다. 넓은 탁자에 마주 앉아 한참 건너편의 그분은 언짢은 내색을 적나라하게 보였다.

성의있게 그분 말을 경청했다. 그분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여태껏 이렇게 일 처리하는 경우가 없었다며 격하게 고조된 그분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들어주었다. 중간 중간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 동조했다.

사실 들어보니 그럴 만하다 생각되었다. 공격의 패를 들고 팽팽하게 날선 감정으로 들어왔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는 연합군으로 마음을 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분은 매력있는 여성이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창작을 하는 예술가이기도 해 작가의 마음을 서로 나누며 친하게 되었다. 전시회도 가고 공연이나 좋은 강연에 함께 하자고 약속도 했다. 서로의 내면을 알기까지 벽이 있었지 경계를 풀고 나니 따뜻하고 말랑한 감성을 나누는 이 시대 아줌마의 의리로 잘 통했다.

‘나는 평생 갑으로만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을의 입장을 몰랐어요. 아니, 알려고도 안 했어요. 한 번 말하면 딱 알아듣고 제대로 일 처리해야지 두 번 물어보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요. 왜 저래? 하는 마음속에는 사람의 급을 정해 등급을 매겼던 것 같아요. 몹쓸 짓이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정말 몰랐어요. 사람 각자는 나름의 매력을 부여받은 인격인데 내 수하에 부리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면 을의 입장이 될 때도 당연히 있을 테지만 외부 경영은 남편 몫이라 세상 바닥의 품위 없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다.

회사 내에서 내 판단으로 결재권을 가지고 직원관리가 전부였던지라 내 직위가 쌓은 벽에 갇혀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는 아이들과 생겼다 한다.

 아이들이 커 성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생활의 연장처럼 아이들에게 정확한 이성을 요구했고 날카로운 지적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다 잘 되라고 하는 지시이고 조언인데 말귀 못 알아듣는 애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

 어느 틈인지 저항이 보였고 존중하는 분위기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위기로 간주하기엔 오랜 갑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이라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한다.

‘이제는 알게 되었어요. 내가 한 말, 행동, 반응이 내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에 얼마나 답답했을지. 마음을 통해 서로를 느껴보는 일이 점점 많아질 것이란 기대에 요즘은 편합니다. 제 인생은 스스로 일궈나가겠다고 부모 그늘을 벗어던진 우리 아들 멋진 젊은이지요.

 갑에 맞서 스스로 일어선 우리 아들 응원해 주세요. 이제 회사 일에도 거의 손을 뗐고요.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어 가끔 울렁증이 오기도 합니다만, 정말 알고 보면 우리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준 직원 분들 덕에 이만큼 여유를 누린다 생각하면 고맙지요.

 사실 갑 노릇하는 일이 마냥 신나고 즐겁진 않았어요. 내 말투가 많이 거슬렸지요. 품위 없는 우상 철거할게요. 노력이 가상하니 가끔 밥 같이 먹어줄 거죠?’
그분의 서툰 아부가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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