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단순히 보기 좋은 그림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선 지 오래다.

   
 

똑같은 칠판이라도 색상과 모양에 따라 학생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현저히 달라지고, 어린이보호구역에 지그재그 모양 차선을 입히면 차량들이 자발적으로 감속을 한다. 소비자들의 식감과 구매욕을 자극하기도 하고, 심지어 질병 치료에까지 활용되는 것이 현대 디자인의 기능이다.

디자인은 국가와 도시의 인상을 결정짓는 의상의 기능도 한다. 산 중턱 ‘HOLLYWOOD’ 구조물은 영화도시 L.A를 상징하는 훌륭한 액세서리고, 산토리니 절벽 하얀 집들은 그리스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드레스다. 다만, 비싼 옷이라고 무조건 멋있는 것은 아니어서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몸에 꼭 맞는 옷을 찾는 안목이 중요하다.

양주시는 소위 옷을 입을 줄 안다. 중후하고 깔끔한 7가지 대표색을 선정하고 이를 한 뼘도 안 되는 복지카드에서부터 대형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반영하고 있다. 디자인을 살리기 위해 디자인을 덜어내겠다는 발상도 양주만의 패션센스로, 누더기처럼 덧입혀진 것들을 하나둘 비우면서 단아하고 세련된 멋을 찾아가고 있다.

2020년을 바라보고 천천히 맞춤복을 완성해 가는 양주의 공공디자인 정책을 들여다봤다.

#공공디자인 비전은 문제점 분석에서 시작
양주시는 공공디자인 개념이 부족하던 시절의 시행착오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흡사 고해성사를 하듯 경관요소별 문제점을 분석했다.

상황은 심각했다. 사업성 위주의 무분별한 건축으로 주변 경관과 무관한 건물이 난립했고, 가로등과 같은 공공시설물은 과도하고 일관성 없는 디자인으로 시야를 어지럽혔다. 건물과 공공시설물의 색채는 말할 것도 없고, 광고물은 수십 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 진단 결과를 토대로 디자인로드맵이 마련됐다. 도시 전체에 통일된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는 지난해부터 시 전역에 사업비 8억4천만 원을 들여 마을단위 경관개선사업을 시작했고, 시설 노후 및 콘텐츠 부재로 침체돼 가는 공간을 별도로 조사해 공공디자인을 도입하기로 했다.

또 오는 2014년까지 무분별한 도시개발을 막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경관 구성요소별 디자인가이드라인을 수립하며, 2020년까지는 시민 스스로 경관사업 주체로 인식할 수 있도록 경관아카데미를 운영할 예정이다.

   
 
#색채가이드라인으로 도시정체성 만들기
양주별산대놀이 탈에서 추출한 노장진회색과 별산담황색, 양주향교적색, 맹골매화색, 송암푸른색, 불곡푸른색, 회암흙색….

시는 올해 초 도시의 역사·자연·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7가지 대표색을 선정하고 이를 브랜드이미지, 도시이미지, 경관이미지에 접목하는 색채가이드라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색은 적용 대상의 특성을 고려해 시가지경관·역사문화경관·자연경관에 따라 미세하게 다르고, 주조색·보조색·강조색을 구분한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인 시설물에는 부드러운 질감의 기본도장을, 사람의 접촉이 적은 시설물에는 거친 샌드도장을 입힌다.

색채가이드라인은 ▶사용하지 않아 버려진 곳 ▶기능적으로 필요하지만 방치된 곳 ▶어둡고 관리되지 않는 곳 ▶의미 없이 넓은 면적을 차지한 곳 ▶조형적 특성이 강한 곳 ▶은폐돼 범죄가능성이 있는 곳 등 디자인 면에서 불완전했던 공간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최근에는 전국 지자체에서 동일한 모양으로 보급하던 공무원복지카드에 양주 대표색과 회암사지 유적을 접목한 카드를 출시하는 등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머지않아 양주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도 도시의 고유한 성격을 쉽게 가늠할 수 있을 전망이다. 사람으로 치면 관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미련을 버리는 것도 디자인! 가로비우기 사업
전북 진안군 마이산 자락 백운면 소재지는 한 대학교수가 이끄는 디자인그룹이 주민을 설득해 가로환경을 개선하면서 동화 속 마을로 재탄생했다. 지금 백운면 주민들은 평범했던 거리에 자신들의 삶과 역사가 담기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광경을 보면서 디자인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디자인 선진국의 차이가 서울 등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에서 극명히 갈린다고 조언한다. 백운면은 매우 특별한 사례고, 여전히 국내 대부분 도시가 대동소이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양주시는 달랐다. 누구라도 잠시 쉬어 가고 싶게 만드는 일본 중소도시의 쾌적함에 주목하고 지난 5월 가로비우기 사업을 기획한 것이다. 꾸미고 더하는 데 치중했던 디자인행정을 거꾸로 뒤집자는 미래지향적 사고였다.

이에 따라 도시미관을 저해하던 과도·불법 설치 광고물을 우선 철거하고, 설치계획이 있는 시설물에 대해 동일형 모델을 권장하는 등 ‘여백의 미 살리기’에 총력을 쏟고 있다.

특색 있는 경관 조성을 위한 가로비우기 사업이 예정대로 공원이나 건축물 등 공공공간 전반으로 확대되면 양주시는 국내외 어느 도시 부럽지 않은 매력을 발산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감동디자인 실현코자 운동화 끈 동여매다
양주시 도시디자인팀 직원들은 지난해 하반기 관내 건축자재 및 공공시설물 생산업체 30곳의 제품디자인을 일제히 조사해 ‘민관 디자인상생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올해부터 직원들은 업체를 수시로 찾아다니며 양주의 디자인 방향을 설명하고 전문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업체의 우수 디자인이 발견되면 다른 업체와 공유토록 했고, 영세 업체에서 양주 대표색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페인트회사와 대량 생산에 합의하기도 했다.

4월에는 아예 도시디자인팀·광고물관리팀 합동 2인 4개 조로 디자인별동대를 조직, 오는 11월까지 광고

   
 
물을 집중 조사하고 장기적으로는 시설물 및 경관자원을 평가해 관련 부서와 개선 방안을 협의할 계획이다.

이렇듯 양주의 디자인 발품행정은 고무적이지만 넘어야 할 산도 있다.

시 직원 전체, 나아가 양주시민 전체가 디자인의 중요성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장밋빛 청사진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시민들에게 양주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기대하기 이전에 공공디자인의 가치를 좀 더 부지런히 알릴 필요가 있다.

신·원도심 격차도 풀어야 할 숙제다. 옛 시설물로 가득한 원도심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공공디자인을 장착해 갈 신도시를 얼마나 따라갈지가 관건인데, 얼마 전 주민과 공무원이 합심해 예술거리로 변모시킨 덕정전통시장만 놓고 볼 때 향후 조망은 쾌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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