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는 월미도가 있다. 여기서 방점은 당연히 월미도에 찍힌다. 인천하면 월미도였고, 월미도는 곧 인천이었다.

 한때 이 문장은 우리 사회에서 상식처럼 통용됐다. 때문에 인천에 가면 반드시 월미도에 가야 했다. 당연히 월미도를 가지 않으면 인천에 가지 않은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이 굳이 월미도일 필요는 없다. 지금 인천을 대표하는 섬을 들라면 아마도 영종도가 되지 않을까? 이 말을 다시 하면, 인천은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도시라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한다. 인천은 항구이고 부두의 도시라고. 인천역이 인천의 종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종점에서부터 새로운 인천이 시작된다.

 인천의 연안부두에 가면 인천이 섬으로 구성된 도시라는 것을 실감한다. 백령도·연평도·이작도 등을 비롯한 서해상의 저 수많은 섬들이 모두 인천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 무수한 섬들이 세포처럼 결합해 인천이라는 거대한 광역시를 만들어 간다. 해서 인천은 섬의 도시이면서, 항구도시이다. 즉, 섬으로 구성된 항구도시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수많은 섬들 가운데 유독 월미도가 인천을 대표하게 됐을까? 인천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인천 출신의 시인이자 탁월한 수필가인 이문재는 월미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월미도가 인천의 상징이 된 계기는 일제에 의한 관광지 개발과 6·25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나룻배를 타고 월미도 해수욕장을 찾았던 세대들은 이제 많지 않다.

대신 교과서에 수록된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월미도는 전국화, 역사화를 이룩했다. 전후세대들

   
 
에게 월미도는 ‘맥아더의 영지’이다. ‘월미도가 맥아더의 관리 아래 있다’는 사실은 자유공원에 올라보면 안다. 1957년 10월 3일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에서 맥아더의 시선은 정확하게 월미도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월미도에 세워져 있는 ‘문화적 표지’도 인천상륙작전의 한 상륙지점을 알리는 표지(유람선 매표소 바로 옆에 있다)가 거의 유일하다.”(이문재, 「인천에는 월미도가 없다:인천의 상징, 월미도론」, 《황해문화》 제4권 3호, 1996, 79쪽)

그렇다. 월미도가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유원지라는 점과 한국전쟁의 인천상륙작전 지점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유원지로서의 월미도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이지만, 곧 육지와 연결돼 있는 곳. 바다를 볼 수 있고 놀이기구도 탈 수 있으면서 수도권에 존재하는 입지적 조건은 월미도를 낭만적 공간으로 호명하기에 충분했다.

1960년대 이후의 영화를 보면 월미도 유원지가 등장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서울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당일 코스는 인천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월미도가 바다를 볼 수 있는 유원지로만 알려진 것은 아니다. 월미도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인천상륙작전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패배적 색채가 짙던 한국전쟁을 구한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2차 대전의 노르망디상륙작전과 비교되면서, 작전이 수행된 월미도와 작전의 지도자 맥아더의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은 마치 자유 진영의 성지처럼 인식됐고, 더불어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그래서 월미도에 가면 자유공원을 들러야 하고, 자유공원에 가면 월미도에 들러야 한다. 시인의 예리한 지적처럼 월미도를 바라보는 맥아더의 시선은 두 지점의 관계를 정확히 보여 준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중요한 월미도와 자유공원을 다룬 남한의 영화는 찾기 어렵다. 물론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는 존재하지만, 월미도에서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의 그 현장을 극화한 남한 영화는 없다.

   
 

 대부분 인천상륙작전의 앞뒤를 다루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황금기에도 인천상륙작전을 다루기에는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거대 규모의 전투 신과 거대 인력이 동원돼야 하는데, 당시 기술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한 연합군의 작전이었기 때문에 남한 영화에서 다루기에는 부담스러운 소재이다.

미국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를 자본도 넉넉지 않고 기술도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제작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작전 전후 병사들의 전투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북한 영화 ‘월미도’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 북한에서 월미도의 인천상륙작전을 영화화한 것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전 때문에 북한은 한국전쟁 초반의 승기를 잃고 압록강까지 밀려 도망가지 않았던가? 왜 그런 작전을 그들이 영화로 만든 것일까? 북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들은 미 제국주의자들과 직접 싸운 조국해방전쟁의 가장 치열한 순간으로 월미도의 3일간의 전투를 기억한다. 그 전투를 통해 영광스럽게 전사한 병사들의 모습을 되새기고, 그 모습을 통해 김일성 신격화를 수행한다.

북한이 주목한 것은 조선인민군의 전략적 후퇴를 위해, 맥아더의 5만 군사에 맞서 단 4대의 포로 3일 동안 용감하게 싸워 견딘, 그래서 지금도 추앙받는 조선인민군 해군포대의 용맹이다.

영화에는 1개 중대가 3일 동안 벌이는 전투가 펼쳐지고, 각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죽어가면서 미군의 함대를 격침시키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마지막 날에는 한 대 남은 포를 두 명씩 나가, 그들이 죽으면 다른 두 명이 다시 나가 사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연합군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 북으로 진격하는 중대한 작전이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최대한 상륙을 늦춰 후퇴할 시간을 벌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작전인 것이다.

북한 영화 ‘월미도’는 1982년에 제작됐다. 1982년이라면 이미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세습이 결정돼 확고화되고 있었고, 김정일에 의해 주체사상이 거의 완성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들의 적인 미국과의 전쟁을 스펙터클한 액션과 동지애로 그려 내부적 결속을 다지려 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김일성은 곧 조국이라는 공식을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일제의 그 모진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뒤 김일성이 찾아준 땅과 조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북한 인민들의 가장 큰 낙이자 축복이라는 것을 영화에서 계속 보여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태양이 바다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배경으로 김일성의 교시가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소개된다. “월미도 해안포병들이 잘 싸웠습니다.

그들은 최고사령부의 명령대로 인민군대의 전략적 후퇴를 보장하기 위하여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결사적으로 싸워 3일 동안이나 적들의 상륙을 막아냈습니다. 우리는 월미도 용사들의 영웅적 위훈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깊이 연구한 정영권 박사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월미도’를 비교하면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관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영화라면, ‘월미도’는 끊임없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조국을 불러내는 영화”(정영권, 「남북한 전쟁영화의 민족 재현 비교 연구」, 《씨네포럼》 제11호, 2010, 201쪽)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전쟁을 개인의 상처 문제로 다루려 했다면, ‘월미도’는 철저하게 국가주의적 시각의 신격화로 다뤘다는 것이다. 북한 영화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월미도’도 철저하게 체제 옹호적이며 일방향의 시각을 담고 있다.

북한에서 ‘월미도’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예술영화 ‘월미도’는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투쟁과 생활에서 큰 실효를 나타내고 있다”라거나 “주체의 인생관에 대한 심오한 예술적인 일반화와 혁명적 낭만성의 결합, 극적인 인간관계에 기초한 치밀한 구성조직, 주인공들의 성격의 개성화와 대중적 영웅주의의 유기적인 통일 등으로 하여 높은 사상예술성을 구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성률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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