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이번 달에는 추석이 있어 모임 날짜를 조정하다 보니 월화수목금토일 비는 날이 없다. 비장한 도원결의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점심과 저녁 약속이 번갈아 있던 날은 늦은 밤 귀가 길도 신경 쓰이고 식구들 눈치도 보게 된다.

짚어보니 이런저런 연으로 발을 들어놓은 모임이 꽤 된다. 하나씩 늘어난 모임은 과부하가 걸려 스케줄 소화하기가 버거울 때도 있다. 참 나, 정치할 것도 아닌데 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나.

오래든 잠시잠깐이든 의기투합이 있어 한 그룹이 되었을 텐데 모임의 성격이 변질된 경우도 있어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멋쩍은 시간이 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소통 잘 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좋은 모임이다,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 함께 어울리면 좋겠다.’ ‘좋겠다’에 세뇌되어 혹은 안면상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 아니면 내가 원해 모임에 들어가기도 했다. 개중엔 발기인으로 참여해 창립멤버가 된 모임도 몇 개 된다. 우리는 남과 소통하고 어울려 지내야 마음이 놓인다.

사회적 관계를 단절해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지나치면 부작용이 생긴다. 관계맺음이 부실하면 불안증세가 오고 외톨이가 된 기분이라 너와 나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더 넓은 인맥을 만들려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중독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과유불급이란 말은 여기에도 해당이 될 테지. 사회적 네트워크가 워낙 왕성하다 보니 활동하는 모임마다 관계형성과 유지력이 탄력을 받는다. 서로 간에 결속력도 높아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에 중독이 되어 위안을 받는다고 느낀다.

이해하고 받아주고 품어 그대들을 사랑하려면 혼자만의 사색이 필요할 것 같다. 떠들썩은 활력은 되지만 내적인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장애물일 수 있다.

혼자서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는 동안 나를 사랑하고 나을 보살피는 지혜가 생겨난다고 한 정신분석 전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혼자를 견딜 줄 아는 능력은 성숙의 기준을 매기는 중요한 정신의학적 평가라는 말도 새삼 되짚어본다. 

‘혼자는 외로워요 나를 좀 봐주세요.’ 의존하다 보면 실상은 더 외로워진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테지만 떠들썩한 모임의 뒤는 공허하다. 공허감이 클수록 사람들은 외부에서 더 위로받기를 갈망하고 나를 지지해주기를 바란다.

동조해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애착증은 정신의 미성숙 상태라 어린 아이의 분리불안 증세와 같다고 한다. 세상만물 중에 오롯이 혼자인 ‘나’를 떠올려 보니 답이 나온다.

허하고 외로운 가슴이 타인 속에서가 아니고 내 입김으로 데워서 내 속에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건강한 숙성이 균형 잡힌 성숙인의 자세이겠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를 가장 잘 보여주는 민족은 어느 나라 민족일까요? 짐작하겠지만 우리나라 국민이다. 동기 동창 모임은 기본 중에 기본이고 동호회와 계모임까지 종류도 수백 개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다.

‘외로운 이가 많은 시대인가 보다.’ 지난 봄 어느 모임에 온 이가 한 말이다. 생각나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열 손가락을 두 번 도는 숫자가 나온다. 연결된 사회적 네트워크가 촘촘해 안심이 되었나?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구나 나도 놀랐다.

그대와 나를 연결하는 데 들인 공이 터무니없이 싸 보여서는 안 되겠지. 헐값에 넘기지 않으려면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량생산과 수작업의 차이가 이런 것일까. 철저한 분업으로 생산성 향상이 미덕인 공장제품은 영혼이 담겨있지 않다. 매끈하고 실용적이고 가격도 싸다. 영혼을 담은 수제품은 오래 걸리고 가격도 비싸지만 장인의 예술혼이 담겨있어 세월이 흐를수록 진가가 빛을 발한다.

한낮은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있어도 기우는 햇살을 타고 가을이 스미고 있다. 사색의 계절답게 깊어지면서 제 색깔을 만들어간다. 덩달아 나도 가을을 살고 싶다.

내밀하고 온화한 계절 속에 잠겨, 보여지는 그대와의 관계를 관리하기보다는 내 색깔을 곱게 물들이는 데 힘을 쏟고 싶다. 세상의 시린 속마음을 품어줄 정인으로 후덕해져 따뜻하게 데운 손 내밀테니 덥썩 잡아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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