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결혼이주여성 원영주 씨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온 원영주(29·베트남 이름 Nguyen Anh Thuy)씨는 올해로 벌써 5년째 한국에서 명절을 지내고 있다.

한국인 남편과 4살 난 아이, 시댁 식구 등이 함께 모여 풍성하고 행복하게 보내는 명절이지만 사실 베트남에 있는 부모와 형제들을 볼 수 없어 텅 빈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원 씨는 호찌민의 한 가구회사 한국지사에서 근무하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지난 2009년 8월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에 한국행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 온 첫해, 원 씨는 다른 문화와 언어 문제 등으로 다시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녀는 “아는 사람도 한 명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말도 잘 안 통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외로운 적이 많았다”며 “힘들 때마다 남편과 나들이도 가고 산책을 했기 때문에 다행히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고국과 다른 명절 문화다.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쭝투(Trung Thu)는 베트남의 어린이날이기도 해 어린이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모여 시간을 보낸다. 시부모는 물론 온 가족이 모여 송편·전 등 명절음식을 만들고 성묘에 나서는 등 생소한 한국의 추석 문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컸던 탓이다.

원 씨는 부모를 보기 위해 베트남에 다녀오고 싶지만 비행기표 등 경제적 여건 때문에 고향을 가지 못한 지 벌써 5년째다. 더구나 해외 통화료도 부담돼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통화도 지금은 2~3주에 한 번 하는 정도로 줄었다.

원 씨는 “통화료가 한 달에 몇만 원씩 나오다 보니 택배로 아이와 가족 사진을 보내는 정도로 부모님과 연락하면서 지냈다”며 “그나마 요즘에는 카카오톡으로 무료 통화를 하며 실시간으로 목소리도 듣고 얼굴까지 볼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재 인천지역 외국인 여성은 모두 2만여 명이 살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이 경제적 등의 이유로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 씨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가진 이주여성들을 돕기 위해 지난 2월부터 계양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지원사 겸 상담 일을 하고 있다.

원 씨는 “저처럼 중국·베트남 등 이주여성들은 특히 명절이 되면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 생각이 나 외롭고 슬퍼하고 있다”며 “당장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하루빨리 베트남으로 가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정회진 기자 jhj@kihoilbo.co.kr

 


 #사할린 이주민 이정희 할머니

   
 

“가족 못 보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지. 명절이면 자식, 손주들 얼굴이 더 아른거려.”
1928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이정희(85)할머니는 10살 되던 해 부모님을 따라 사할린으로 이주한다. 강제 이주는 아니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어떻게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사할린에서의 삶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추위와 배고픔은 언제나 어린 이정희 할머니를 괴롭혔고, 광부일을 하며 가족을 건사한 할머니의 아버지도 이국 땅에서의 정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식량 배급을 받으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지만 할머니의 아버지는 창씨개명에 반대하며 배급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1946년 결혼 때까지 본래 이름인 ‘김정희’로 살아갈 수 있었다.

1945년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지만 그 소식이 사할린까지 닿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정희 할머니는 “조선의 해방 소식을 들은 건 결혼한 지 한참 지난 뒤였다”고 회고한다.

1946년 12월 9일 미국과 옛 소련은 사할린 거주민 중 귀환 대상자를 일본인 포로와 일본인으로 한정하는 ‘소련지구송환미소협정’을 맺는다.

이에 따라 1949년 7월 22일까지 29만여 명의 일본인이 귀향했지만 이 할머니 등 4만 명이 넘는 이주민과 그 후손들은 한일 적십자사 간 협약으로 영구귀국이 시작될 때까지 수십 년을 타국 땅에서 살아야 했다.

특히 북한이 배재된 협약이어서 이정희 할머니처럼 이북이 고향인 이주민들에겐 고향을 두 번 잃는 일이었다.

이 할머니가 한국 소식을 처음 접한 건 1988년이었다. 남한 사정에 밝지 못했던 사할린 이주민들에겐 남한의 경제 발전과 자유로운 삶은 실로 충격이었다.

올림픽 이후 이 할머니는 한국 방문을 위해 수소문 끝에 수원시에 살고 있는 친척을 찾고 54년 만인 1992년 남편과 함께 고국 땅을 밟는다.

이후 영구귀국을 결정했지만 할머니의 남편은 1996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3년 뒤인 1999년 이정희 할머니는 인천시 연수구의 사할린동포회관으로 영구귀국한다.

할머니는 61년 만에 고국 국적을 갖게 됐지만 사할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의 삶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

이정희 할머니는 “큰아들은 이미 60이 훌쩍 넘었지만 자식 보고 싶은 부모 마음이 어디 다르겠느냐”며 “몸만 성하다면 사할린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현재 매주 3차례 투석을 받지만 아들들이 사는 곳의 병원엔 투석을 위한 병상이 마련되지 않아 사할린행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러시아에서 옷가게를 하는 손녀가 한국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회관에 들르는 게 작은 위로일 뿐이다.

이정희 할머니는 “2009년까지 일본 적십자사에서 가족 방문을 위해 예산을 들였지만 지원을 끊은 뒤 가족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며 “일본 적십자사가 앞으로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이 할머니는 “사할린과 북한의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태용 기자 tyc@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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