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포구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서해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시장, 특유의 그 생동감이 살아있는 곳. 그러나 소래포구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사라진 수인선의 협궤열차, 그 기차를 둘러싼 수많은 추억이 저장돼 있는 곳. 추억을 회상하는 이들은 이제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 다리를 건넌다.

 더 모순적인 것은 소래포구의 초라한 시장과 그를 둘러싼 작은 바다에 비해 주변은 거대한 아파트로 숲을 이뤘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소멸의 시간과 공간을 추억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해서 소래포구에 오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원래 포구는 배가 드나드는 개의 어귀를 말한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바다의 내음을 맡게 해 주고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게 해 주는 곳. 수도권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포구 앞에 어떤 지명이 붙어야 자연스러운지 질문하면 아마 50% 이상은 소래포구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야말로 고유명사를 넘어 대명사가 돼 버렸다. 대도시와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소래포구가 수도권에서 명소가 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곳. 특히 김장철이 되면 메인 뉴스에서 자주 이곳의 젓갈을 소개한다.

소래포구는 처음부터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경기도에 존재하는, 그렇고 그런 포구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포구 안쪽에 염전이 생기면서 쌀을 수탈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된 수인선과 연결돼 협궤열차가 다니면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소래포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포구도 포구지만 염전이 큰 역할을 했다. 생각해 보면 이곳의 명물인 젓갈도 결국은 소금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 않은가.

전쟁 이후 이곳에 자리잡은 사람들이 수인선을 타고 인천이나 근교 도시로 나가 생선을 팔거나 젓갈을 팔면서 서서히 수도권에 알려지다가 1970년대 이후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소개돼 전국적인 유명세를 띠게 됐다.

   
 
소래포구에 들러 회를 먹고 게를 사거나 젓갈을 사 집으로 가는 것. 그 길에 수인선의 협궤열차를 타고 바다를 보며 가는 그 과정이 하나의 낭만적인 의례처럼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인천·수원·안산·서울 서부 등지에 사는 이들에게 소래포구는 낭만과 동일시됐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회고하는 소래포구는 마치 경춘선의 강촌과 같은 곳이다. 현실에서는 사라졌지만 추억 속에는 뚜렷이 존재하는 곳, 그래서 자꾸만 찾아가는 곳.

2010년대 소래포구에 가면 과거의 낭만적인 풍경을 보기는 더욱 어렵다. 시속 60㎞의, 세상을 넉넉하게 구경하며 달리던 협궤열차는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아 인파의 숲에 파묻히기 십상이라 차분히 바다를 보며 사색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바다를 보는 맛도 느끼기 어렵다. 넓은 갯벌에 둘러싸인, 회색의 바닷물은 감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어마어마한 인파들이 소래포구를 찾는다.

그들은 왜 그곳으로 가는 것일까? 소설 「협궤열차」에서 윤후명은 특유의 소멸의 미학을 노래한 바 있다.

“한 번 간 사랑은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애틋함이나 그리움은 저세상에 가는 날까지 가슴에 묻어두어야 한다.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거들랑 자기 혼자만의 풍경 속으로 가라.

   
 

그 풍경 속에 설정되어 있는 그 사람의 그림자와 홀로 만나라. 진실로 그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은 그 풍경 속의 가장 쓸쓸한 곳에 가 있을 필요가 있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서는 인간은 고독해질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포구의 가장 쓸쓸한 내 장소로 간다”

일찍이 ‘소멸의 미학’에 탐독했던 작가답게 인간이란 반드시 이별과 직면해야 하고, 그 이별을 자신만의 그리움으로 간직한 채 그 사람의 그림자와 만나야 한다고, 그 만남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고독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돌아오지 못한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이제는 과거의 정서가 사라져 버린 소래포구로 온다면 물론 나의 억지일 테지만, 그러나 몇 사람은 협궤열차도 없고 추억도 희석된 그곳으로 찾아와 자신을 뒤돌아볼 것이다. 그러면서 젊었던 한 시절을 쓰라리게 회상하고 추억할 것이다.

소래포구에서 절대적인 고독과 대면했다면 이제 소래염전으로 가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물론 그곳도 더 이상 염전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사라진 채 현재의 새로운 시간 속으로 포섭돼 있는 곳. 때문에 소래염전 역시 소래포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소래염전은 소래포구의 번잡함으로부터는 벗어나게 해 준다. 넓게 펼쳐진 갯벌을 볼 수 있고, 수평으로 펼쳐진 아담한 염전을 지금도 구경할 수 있다. 소금창고는 여전히 몇 동 보존하고 있다.

이곳은 무척이나 평안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소금을 만드는 과정도 없고 눈으로만 보는 공원이 됐기 때문에 그 과정의 치열함을 느끼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공원이 돼 산책을 하는 곳. 그러나 나는 우리가 소금을 만들었던 그 공간을 이렇게 여유롭게 산책해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

더구나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는 대부분 삶의 치열함이 묻어있는 ‘가난한’ 영화들이었다. 범위를 확대하면 염전에서 촬영한 영화가 대부분 그러했다. ‘감자’(변장호, 1987)의 복녀는 세상의 타락한 이치를 알게 되고, ‘만다라’(임권택, 1981)의 지산은 염전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래염전에서 촬영한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이원세, 1977)는 큰 흥행을 한 영화이다. 13세 소년 김영출의 이야기. 어머니는 막내를 낳고 무리하게 염전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정신병원으로 보낸 후 영출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진다.

동생 영호도 학교에 보내야 하고 막내 철호를 업고 일을 해야 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삼형제를 고아원, 양자로 보내려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

지독히도 가난하던 시절, 아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영화화해 흥행을 기록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단체 관람을 지시했고, 1편의 흥행으로 3편까지 제작됐다.

   
 
흥미롭게도 다시 영화 속에 등장한 소래염전은 또 이원세 감독이 연출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조세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 난장이 김불이가 겪는 불행. 두 아들과 막내딸과 살아가는 난장이는 악단에서 나팔을 불었지만 악단이 해체된 후 술집에서 안내원으로 일한다.

이때 염전지대 판자촌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공장 건설 때문에 집을 비우라고 하고, 결국 가족의 집을 부수러 사람들이 온다. 팔아버린 주택분양권을 구해 딸이 돌아온 날, 아버지는 높은 굴뚝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만다.

나는 ‘엄마 없는 하늘 아래’보다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훨씬 좋다. 소재적 측면, 신파적 요소에서 전자가 불편하기도 하지만 같은 감독의 영화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스타일적으로도 다르다.

후자는 가난한 이들의 폭발할 듯한 아픔을 내적으로 삭이면서 차분히 응시하고, 하늘 아래 펼쳐진 수평선의 염전을 높은 스크린에 화폭처럼 담아 사색의 여유를 충분히 주도록 만들었다. 원작의 대사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인물들의 아픔을 깊이 있게 만들어 낸다.

폭발하지 않지만 어떤 영화보다 강한 영화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나는 이 영화가 한국영화사에 기록돼야 할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고 있는 영화다.

<강성률 -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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