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에 정해진 노선이 있다면 똑같은 생(生)이 살아지려나. 흔히들 생은 아름다운 것이라 이미 탄생 자체로 한 생명은 손색 없는 축복이라고 한다.

우리 삶이 올 때 축복이었듯이 가는 길도 축복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지만 얄궂게 꼬이는 일들이 매복해 있다가 발 걸어 넘어뜨리면 난감해진다.

그래도 바람은 세월이 공평하게 흘러서 대차대조표에 손실이 없다면 억울함도 후회도 없을 테니 그런대로 잘 살았었구나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추석 연휴에 한동안 못 만난 친척을 찾아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다가 내 유년의 기억에 장부의 풍채로 남아 있던 고향 동네 어르신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 계시면 구십 연세신데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한다. 그분은 주변 동네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해 어느 동네 누구라 하면 다 인정하는 존재감을 가진 분이셨다.

지난한 세월이 그분에게만 흘렀을 리 없겠지만 변화무쌍한 시절의 리듬을 타지 못해 여러 차례 불운을 맞으셨는데도 절개 꼿꼿한 일생이라 고향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사춘기 무렵까지 찾아가곤 했던 아버지 태어나신 고향은 일가친척 대부분이 도시로 나와 갈 일이 없어지고, 동네 사람들도 근동 사람들도 가물가물 잊혀져 갔다.

한때 동네 사람들은 그분의 장손을 부러워했었다. 서울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입신양명의 길인 판검사가 돼 일찌감치 영감님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것에 전혀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아들이 고시 공부로 십년 하 세월을 보내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진 농법으로 고향 동네를 개혁하겠다며 실험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고시 공부하다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혀를 찼고, 하필이면 모진 농사일을 애꿎은 취미로 만들었느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동네 들어오는 입구 당산나무 옆 나지막한 비탈에 그분 소유의 꽤 큰 밭이 있었는데 그곳에 원두막을 짓고 숙식을 하면서 실험적인 농사를 시작했지만 여러 해 실패를 거듭했다.

어르신은 철저한 준비 없이 큰일을 도모하려고 덤벼드는 아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어 ‘썩은 새끼로 범 잡기’라며 나무랐고 부자간 갈등이 깊어져 의절했다는 풍문도 들었다.

 훗날 아들은 아버님의 속 깊은 말뜻을 깨우쳐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학문의 길로 들어서 학자가 됐고, 선친의 묘가 있는 고향 동네에 여러 동료 지인들과 전원주택을 지어 빈집 많은 고향 동네를 지키고 있다.

어르신은 동네 사람들의 정신적 기둥이셨던 지라 찾아오는 객들을 대접하고 세상을 논하며 늘 정갈하게 사셨다. 환갑에 이르러 물러날 때라며 여러 단체의 원로 자리를 스스로 퇴임하셨고, 칠순에 경제활동과 관련된 모든 자산관리에서 손을 뗐다.

 여생은 버리고 가벼워지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기라며 떠날 때 미련 없이 홀가분해지려면 몸도 마음도 물욕도 다 내려놓아야 한다 했다.

 자리에서 물러나니 찾아오는 손님이 점차 줄어들고, 재물을 다루는 이재에서 손을 떼니 투기꾼 발길이 끊기고, 번잡한 시절을 떠나보냈더니 말년이 이리 평안하다 하셨다 한다. 어르신 말씀이라며 전해들은 이야기다.

사람은 평생 세 번의 정년을 맞이하는데 첫 번째가 직책을 내려놓은 일이고, 두 번째가 재물 관리에서 손을 떼는 경제활동 마무리이며, 마지막이 인생 하직으로 영원한 정년을 하는 것이라 한다. 요즘은 백세 시대란 말이 유행어를 넘어서 현실로 증명이 되는 세상이다.

준비 없는 장수는 재앙인 시대를 맞았고, 준비 없는 긴 노후가 얼마나 심각한지 고민하는 여론이 팽배해진 시대다.

명예보다는 자신에게 진실한 삶이 환영받는 분위기라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행복추구권 시대가 내 노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어르신의 한 생이 그분 개인적으로 행복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소신 있게 평생을 사신 모습을 보면 이중 노출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은 진심이 담긴 생을 사신 것만은 분명하다.

내 앞에 놓인 긴 세월에 세 번의 정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세 번의 정년이 각각 의미 있어지려면 그분의 삶을 경배했듯이 나에게도 스스로 격을 부여해 아름다운 정년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탄생의 축복이 하늘의 이치라면 축복의 마무리는 땅의 이치라 생각돼 아름다운 정년을 잘 일궈 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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