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36년에 걸친 일제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지 불과 7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고, 게다가 미 군정체제 아래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기관이나 시설에 앞서 박물관을 우선적으로 개관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나 지금이나 박물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적지 않은 예산과 인력이 필요하고, 인천은 개항 이전까지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조금 비껴나 있어 뚜렷한 유적지나 유물이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항만과 산업시설의 복구와 운영을 준비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박물관을 설립할 수 있었을까?

# 세창양행 사택이라는 건물

▲ 1946년 4월 1일에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박물관.

박물관을 설립하는 데 가장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부분이 바로 시설이다. 지금에야 최첨단 시설로 중무장한 박물관들이 생겨나고 있어 건축비보다 전시시설비에 보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지만, 진열장을 제외하곤 별다른 전시시설이 없던 초창기에는 초기 투입예산으로 건축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박물관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건물을 인천시가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인천시립박물관의 빠른 개관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다.

처음 박물관이 문을 열었던 건물은 1890년께 독일계 무역상사였던 세창양행의 칼 발터(Carl Walter)의 소유로 지어져 세창양행 사택이라 불리던 건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적산가옥이 됐고,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해 그해 9월 1일 인천부립도서관을 개관했다. 1941년 4월 10일 도서관을 이전한 뒤 해방될 때까지 이 건물은 인천향토관이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창양행 사택은 지금의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남향으로 지어져 인천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벽돌 구조의 단층 건물로 회칠을 한 외벽에 남쪽으로 9개의 아치로 구성된 회랑을 설치하고 붉은 기와지붕을 얹어 외관도 매우 뛰어난 건물이었다.

박물관 설립에 있어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건물, 그것도 이미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건물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해방정국에서 인천시립박물관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가장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 발로 뛰며 확보한 유물
확보된 박물관 건물과 시설이 있다 해도 유물이 없었다면 박물관의 문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박물관으로 확보한 건물은 일제강점기 ‘인천향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던 전시관이었다. 이곳에 어떠한 전시품들이 진열돼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시립박물관 유물목록 중 개관 당시 ‘인천향토관’으로부터 인수했다고 기록된 유물이 43점으로, 미술품과 러일전쟁 관련 유물이 대부분이다.

이 유물들은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미처 가져가지 못한 적산물품이었을 것이고, 미 군정청에서는 건물과 유물의 처리를 고심하던 끝에 박물관 개관을 결정했을 것이다.

▲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인천시립박물관.
물론 이들만 가지고 박물관을 개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박물관다운 박물관을 꾸미는 데에는 보다 많은 유물이 필요했다. 우선 국립박물관과 국립민족학박물관의 지원으로 79점의 유물을 대여했고, 귀국하는 일본인의 살림살이 중 세관에 압수된 골동품을 인수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부평에 있던 일본육군조병창에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 옮겨왔으나 해방으로 창고에 쌓아 두고만 있던 중국의 금속유물을 박물관으로 이관했다. 이렇게 해 300여 점이 넘는 유물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박물관의 문을 열 수 있었다.

# 그 사람, 석남 이경성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에서 인천시립박물관이 신속하게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초대 관장 석남 이경성(1919~2009)선생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19년 2월 17일 인천시 화평동 37번지에서 태어난 이경성 선생은 경동에서 밀가루 도매상이었던 부친 덕분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일본 유학시절 법학을 전공했으나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가 박물관을 꿈꿨던 것은 역시 인천 출신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과의 교류 덕분이었다. 개성부립관장으로 있던 고유섭 선생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박물관과 미술사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였던 1945년 9월 이경성 선생은 군정청 교화국장을 찾아 박물관에 대한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서 국립박물관 김재원 관장을 소개받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무렵 인천시의 정무를 담당하고 있던 미 군정관 홈펠 중위가 박물관을 찾아 인천향토관을 시립박물관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음을 설명했고, 이경성 선생은 고향에서 박물관에 대한 꿈을 이룰 좋은 기회라 생각해 짧았던 국립박물관 생활을 마감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한다.

▲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석남 이경성 선생.

1945년 10월 31일 약관 26세의 나이로 인천시립박물관장에 부임한 이경성 선생은 개관 날짜를 자유공원 곳곳에 꽃들이 만발하는 이듬해 4월 1일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개관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일본인들이 남기고 돌아간 인천향토관 건물의 보수가 시급한 일이었다. 시내 여기저기서 수리에 필요한 재료를 기증받아 마루를 고치고 페인트를 칠하는 등 박물관 건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단장했다. 인천시내 곳곳을 누비며 유물을 수집했던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낡은 건물을 시립박물관으로 만드는 데 주어진 시간은 불과 5개월 남짓이었고,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다.

# 1946년 4월 1일 오전 10시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박물관 회랑에서 인천시립박물관의 개관기념식이 거행됐다. 당시 임홍재 인천시장, 길영희 인천중학교 교장, 황광수 인천시교육감, 미 군정장관 스틸만 중령 등 인천의 유지들과 시민들이 박물관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한다.

식전행사로 박문여고 합창단의 합창공연이 거행됐고,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박물관 관람이 행해졌다고 당시 지역일간지였던 ‘대중일보’는 전한다.

이 신문에 따르면 개관 당시 박물관의 전시 구성도 살필 수 있는데, 우선 박물관은 모두 6개의 진열실을 갖추고 있었다. 1진열실에는 금제 풍차 등의 금속유물이 전시돼 있었고 2~4진열실에는 도자기가, 5진열실에는 토기와 기와, 마지막으로 6진열실에는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제대로 된 정책 수행이 어려웠을 시절,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공립박물관을 만들었던 도시였다. 어디 박물관뿐이랴?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운영해 오던 시립도서관이 있었고, 1947년에는 문화회관까지 갖춘 이른바 문화도시였다. 박물관 개관 69주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과연 인천은 어느 정도의 문화지표를 가지고 있을까?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원대철제범종(元代鐵製梵鐘)

   
 

인천시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이 범종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제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부평의 일본육군조병창에 수송해 왔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무기를 만들기 위한 금속품들을 수송해 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이 되면서 미처 무기화되지 못한 금속품들이 조병창 마당과 창고에 쌓여 있었다고 전한다.

인천시립박물관 이경성 초대 관장이 박물관 개관을 위해 이 범종을 비롯해 7점의 중국제 금속유물을 인수해 왔다. 박물관 초창기 사진을 보면 범종의 위치는 아치형 회랑 앞쪽에 전시돼 있었는데 지금과 같이 별도의 보호각은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종신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대덕 2년(1298) 3월 허난성(河南省) 루양현(汝陽縣)에서 주조됐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매달아 두는 용뉴는 쌍룡(雙龍)으로 천판(天板)을 입으로 문 채 서로의 몸을 휘감고 있다.

 종신(鐘身)은 안으로 잘록하게 살짝 휘어진 완만한 곡선 형태를 보이다 종구(鐘口)를 향해 벌어지면서 마무리된다. 천판과 종신의 경계 역시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져 있고, 연판문(蓮板文)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는 가운데 원형의 구멍이 같은 간격을 두고 뚫려 있다.

종신은 상하 이단으로 나뉘어 가로 방향의 돋을 선으로 공간을 크게 구획했다. 상하단의 공간은 다시 여러 개의 돋을 선으로 가사문대(袈裟文帶)를 만들었으며, 그 안으로 명문을 새겨 놓았다.

이처럼 종신부 전체를 구획해 명문을 새겨 넣는 것은 우리나라의 범종이 연봉오리를 조각해 연곽(蓮廓) 안에 두거나, 당좌(撞座)를 조각한 것과는 크게 다른 형식으로 중국 종의 특징이다. 종구의 끝 부분은 물결무늬(波狀形)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로는 팔괘(八卦) 무늬가 돌아가며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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