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로서 타국에서의 삶은 매우 고단한 것이다. 현지에서의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이 주는 어려움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민족문화에 대한 향수가 커져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지친 생의 여정에 몸에 맞는 옷, 맛있는 음식, 따뜻한 집이 돼 지친 삶을 달래주는 한 줄기 빛으로 역할해 온 곳이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극장인 고려극장이다.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극장은 국립극장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200회 이상의 공연을 해야 했고, 이를 위해 6개월에 이르는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이 모든 공연을 매번 연극만으로 채우기는 벅찼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보다 더 쉽게 고려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고려극장은 1968년 ‘아리랑가무단’을 조직했다. 이를 위해 전문음악인과 무용인들을 모집했다.

1세대 음악인으로 박영진, 정인묵, 김홍률 등이 들어왔다. 박영진은 소비에트 고려인음악을 개척한 최초의 고려인이었고, 정인묵은 새로운 조류의 음악을 도입한 실험적 음악가로서 아리랑가무단 창설의 주역이었으며, 김홍률은 내면의 느낌을 외부로 표현하는 가수였다.

이러한 1세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대표적인 고려인 음악가가 한 야꼬브 니꼴라이비치(Яков Хан Николаевич)이다. 아리랑가무단에 트럼본 연주자로 입단해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한 야꼬브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 통합음악가, 한 야꼬브 니꼴라이비치
한 야꼬브는 남부 카자흐스탄 침켄트 주에서 출생했다. 침켄트음악대학 오케스트라학과에서 트럼본을 전공했고, 침켄트국립사범대학에서 무대지휘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국립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 들어가 아리랑가무단의 단원으로 시작해 상임지휘자를 거쳐 지휘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카자흐 라디오-텔레비전 무대심포니 악단, 알마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예술음악단장, 고려인 ‘가야금’연주단 지휘단장, 카자흐스탄 인민가수 로자 름바예바의 재즈록그룹 ‘아라이’의 음악담당 등으로 활동했다.

1980년부터 재즈협주단 ‘부메랑’, ‘메데오’를 이끌고 소련 각지에서 개최된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그가 작곡한 ‘첫걸음’이 드네프로페트롭스크시에서 거행된 국제 재즈축제에서 최고작곡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시작해 고려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들의 음악을 작곡했다.

1987년에는 고려극장 최초로 록오페라 ‘음양’을 작곡해 무대에 올렸고, 채영 희곡 ‘견우와 직녀’, 연성용 희곡 ‘양산백’, 허진(허웅배) 희곡 ‘사랑과 또 그 무엇에 대하여…’ 등의 연극음악을 작곡했다.

1989년에는 고려극장 최초로 아리랑가무단을 인솔해 4월에는 평양에서, 10월에는 서울에서 공연했다. 1993년 최초의 민속악단으로 창단된 사물놀이팀을 이끌고 2001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공연에 참가해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우리 고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수집해 다오. 이 노래들이 아주 잊혀지기 전에.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아직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려극장 대선배 연성용 극작가와 원로 배우 안 미하일이 한 야꼬브에게 했던 간곡한 권유였다. 한 야꼬브는 20년여 년이 흐른 후에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란 책을 김병학과 함께 펴내면서 대선배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녹음기를 둘러메고 2004년 후반부터 2005년 초반까지 카자흐스탄 고려인 집성촌의

▲ 고려극장 ‘아리랑가무단’ 공연모습.
전 지역과 우즈베키스탄·러시아의 수많은 고려인 집성촌을 찾아다니며 고려인 촌부들이 그때까지 잊지 않고 부르던 우리 노래들을 한 곡, 한 곡 녹취했다.

반년의 노력 끝에 1천여 곡의 노래를 녹음하고 수백 곡의 가사가 적힌 여러 권의 가요 필사본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 김병학 소장과 함께 2년여에 걸쳐 정리를 했다.

이렇게 녹음기에 취입한 노래는 324곡, 수집한 가요 필사본은 261곡이다. 여기에 김병학이 수집한 가요 필사본과 구술을 받아 적은 노래 157곡, 재소고려인 신문에서 발굴한 노래 228곡을 합쳐 총 970곡이 조사됐다.

그 중 발음이 부정확해 가사 판독이 불가능하거나 내용이 너무 짧은 노래, 반복되거나 겹치는 가요들을 서로 비교해 제외하고 악보가 있는 가요 377곡, 악보 없이 채록·정리된 가요나 가사 191곡을 추려 2007년 2권의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를 간행했다.

한 야꼬브의 고려가요 연구는 언제나 우리들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노래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이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연구를 시작했다면 고려가요는 잊혀져 가는 재소고려인의 노래가 됐을 것이다.

# 카자흐스탄 최초의 재즈음악가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 김병학 소장은 한 야꼬브를 통합음악으로 제3의 길을 연 탁월한 아방가르드의 모범이라고 한다. 정통음악과 한국 민속음악뿐만 아니라 재즈에도 깊은 조예가 있기 때문이다. 한 야꼬브는 카자흐스탄에 재즈음악을 도입한 사람 중 하나이다.

소리에 천부적인 느낌과 재능을 가진 한 야꼬브는 젊어서부터 재즈음악에 마음이 끌렸다. 1980년대 초반까지 재즈는 구소련에서 퇴폐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음악으로 치부됐다.

유럽음악의 화성에 흑인음악의 즉흥성이 결합된 재즈음악은 기성음악의 정통성을 흔들며 새로운 자유와 가능성을 찾아 생겨난 음악장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인들에게는 기피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자유로운 예술가적 기질과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을 갖고 있는 젊은 음악가에게는 즉흥성과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재즈음악이 자신의 예술혼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장르로 인식됐다.

한 야꼬브는 1979∼1980년 카자흐스탄 인민가수 로자 름바예바의 재즈록그룹 ‘아라이’의 음악을 담당했다. 1980∼1982년에는 재즈협주단 ‘부메랑’과 ‘메데오’를 이끌고 모스크바·야로슬라벨·노보시비르스크·레닌그라드·비쉬켁·타라즈·알마티에서 개최된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해 국제적인 재즈협주단과 자웅을 겨뤘다.

1991년에는 카자흐스탄 재즈음악의 부흥과 발전시킬 목적으로 알마티시에서 재즈악단 ‘빅밴드’를 창설해 여러 국제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했다.

‘빅밴드’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시립교향악단에 소속돼 있으며, 그는 2001년부터 지금까지 이 악단의 예술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 카자흐스탄 재즈악단 아라이 단원들.

 1993년에는 각 지역 재즈전문가 및 비평가가 참석한 노보시비르스크 재즈행사에 카자흐스탄을 대표해 참가하기도 했다.

미래의 재즈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2004년부터 시작한 알마티시 일반 학교 학생들의 재즈음악교육은 2011년 개최된 전 카자흐스탄 재즈페스티벌에서 제자들이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에는 알마티시립악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해 최우수 편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간행된 「세계 재즈인 백과사전」에 카자흐스탄인으로는 한 야꼬브와 타히르 2명만 오를 정도로 그는 카자흐스탄 재즈음악의 대부이다.

한 야꼬브의 음악인생은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그는 정통음악에서 나와 제3의 길을 열었고, 이제 그 길은 누구나 사랑하는 새로운 장르가 됐다.

그 새로운 길은 과거를 현재에, 이것을 저것에, 이 차원을 저 차원에, 한 민속음악을 다른 민속음악에 종합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초월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기에 한 야꼬브의 음악은 늘 진보하고 진화하고 도약한다. 최근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손치근 총영사의 요청을 받아 ‘고려인 아리랑’을 작곡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14년 한 야꼬브의 자료를 통해 고려극장의 음악적 활동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중 대표작의 악보와 음원, 그리고 본인이 직접 채록한 고려인 가요의 음원을 한국이민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글=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