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립박물관 뒷마당에는 쇠로 만든 중국 종(鐘) 3점이 나란히 서 있다. 오래전 부평조병창에서 가져온 이 종을 보고 왜 한국 박물관에 남의 나라 종을 전시해 놓았느냐며 질책하듯이 말을 하고 가는 관람객도 가끔 있다.

사실 외국의 종이 우리나라 박물관 전시장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낯익은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종은 그냥 다른 나라에서 만든 보통의 ‘종’ 이상의 의미가 있다.

#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던 곳, 조병창(造兵廠)

▲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명대철제범종.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가 흔히들 부평조병창이라고 부르는 곳은 일본이 소총·총검·탄환·포탄 등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1939년 부평구 산곡동 일대에 건설하기 시작한 군수공장으로, 정식 명칭은 인천육군조병창이다. 1941년 완공된 부평조병창은 일본 오사카에 있던 육군조병창의 지역공장으로 일본 본토 밖에 세워진 유일한 조병창이다.

이곳 조병창에서는 광복이 될 때까지 매월 소총 4천 정, 총검 2만 정, 탄환 70만 발, 포탄 3만 발, 군도 2천정, 차량 200량 등을 만들어 냈고 1944년부터는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을 감독하면서 소형 잠수정도 제작했다고 한다. 조병창 주변으로 하청업체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부평은 거대한 중공업단지가 됐다.

광복 이후 조병창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미군의 병참 지원을 위한 애스컴(ASCOM, 주한미육군병참본부)이 들어서 1970년대 초반까지 운영됐고, 이후 부지와 시설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미군기지인 캠프마켓(Camp Market)이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쇠붙이가 유물이 되다
1973년 4월 21일자 모 신문에는 “인천시 부평동 일대에서 청나라 동전이 쏟아져 나오자 이곳 주민들은 너도나도 땅파기 경쟁이 한창. 일제 말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부평동 일대에 쇠붙이 등을 묻고 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19일 부평동 밭에서 청나라 말기에 사용하던 광서원보 등 6종의 동전 1만여 개를 파내자 이 일대 주민들이 삽을 들고 나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병창에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는 물론 저 멀리 중국에서 공출한 각종 쇠붙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릇이나 수저와 같은 생활도구부터 철로와 교각, 사찰의 범종에 이르기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무기의 재료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병창이 문을 닫은 지 3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미처 정리되지 못한 동전과 같은 쇠붙이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광복된 해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27세의 나이에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된 고(故) 이경성 관장은 조병창에 쌓여 있던 쇠붙이 가운데 몇 가지를 가져와 박물관의 유물로 삼았다.

그는 박물관 개관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소장품을 수집하던 차에 초대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관장에게서 부평조병창에 중국 각지에서 빼앗아 온 철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 날 그는 당시 미 군정청 교육담당관이었던 홈펠(Hompel)중위와 함께 조병창으로 가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골라 미군 트럭에 싣고 왔다. 그 트럭에는 중국 범종과 함께 청동향로와 수형대포(獸形大砲)도 실려 있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맥아더 동상 자리에 있었던 옛 박물관(옛 세창양행 사택)의 야외에 자리 잡았다.

흥미롭게도 조병창에 있던 중국 유물은 박물관에만 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강화도 전등사에 있던 종도 공출됐는데 광복 이후 전등사 주지가 빼앗겼던 종을 찾아나섰다고 한다.

▲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중국범종 3점.
그런데 부평조병창에 큰 종이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더니 그 종은 전등사 종이 아니라 중국 범종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전등사에 걸려 있는 범종은 당시 조병창에서 가져온 중국 북송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이 범종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한편, 종은 부피가 큰 탓에 서양에서도 전쟁물자로 공출되는 예가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종들이 몰수돼 무기 제작용으로 녹여졌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유럽 각국의 수많은 종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공출됐다고 한다.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평화와 안식의 상징인 종이 해를 입히는 사람을 해하는 무기의 재료가 되는 역설을 만든다.

# 중국 유물의 고향
오래전 조병창에서 가져온 범종은 넓디넓은 중국 땅 어디에선가 하늘에 복(福)을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향로와 대포도 나름의 목적으로 정성스럽게 제작됐을 것이다. 강제로 가지고 온 것이라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주소가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몸체에 남아 있는 명문을 통해 출신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시립박물관에 있는 중국 범종 3기는 각각 송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제작 시기는 다르지만 만들어지거나 사용된 장소는 비슷하다. 송나라 범종은 정확하게 제작지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명문에 나오는 수무현(脩武縣) 등의 지명으로 볼 때 주조 장소나 사용처가 오늘날 허난(河南)성 지역으로 보인다.

원나라 범종도 허난성 안양현(安陽縣)에서 제작됐고, 명나라 범종은 허난성 상구현(商丘縣)에서 태산행궁(泰山行宮)이라는 사원에 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강화 전등사에 있는 범종도 허난성에 있는 숭명사(崇明寺)라는 절에 있던 것으로, 조병창에 있던 범종은 모두 허난성 일대에서 만들어지거나 사용됐다.

또 무기라는 점에서 종과 성격은 다르지만 동물의 형상을 띤 청동대포도 허난성 개봉(開封)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향로는 그 출신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이 또한 종과 대포와 동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병창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각자의 나이는 다르지만 고향은 모두 중국 허난성이다.

# 중국 유물, 인천의 역사가 되다.

사연 없는 삶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도 모두 저마다 이야기가 있다. 그 중 길게는 천년 동안 중국 땅에 있다가 어느 날 일본에 의해 공출돼 한국의 낯선 땅에서 용광로에 녹여지기 전 운 좋게(?) 박물관의 유물이 된 중국 종과 대포, 향로의 사연은 조금 남다르다.

박물관에 있는 중국 유물의 이야기는 130여 년 전 개항 이후 인천, 더 나아가 한반도가 겪었던 굴곡진 노정과 닮아 있다. 70여 년 전 조병창 뒷마당에 단순한 쇠붙이로 버려져 있던 이 중국 유물들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외국의 물건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흠뻑 머금고 있는 인천의 유물이자 역사다.
<글=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수형대포(獸形大砲)

   
 

조병창에서 인수한 유물 가운데 하나로 짐승의 모양을 한 대포다. 전체적으로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대포의 입(口邊) 위에 부리부리한 눈과 큰 눈썹 그리고 우뚝 솟은 코 양쪽으로 균형 있게 처리된 수염이 있다.

얼굴에 비해 몸체와 다리는 약간 왜소하게 표현돼 있다. 이것은 대포의 형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대포의 아랫부분에는 양쪽으로 길고 둥근 쇠뭉치가 달려 있어 포가(砲架)에 걸어서 바퀴로 끄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포의 구경에 비해 포신이 짧고 장식성이 강조된 형태로 볼 때 실전에 사용된 대포라기보다는 신호용 또는 의식용 예포(禮砲)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대포는 중국과 한국에서 찾아보기 독특한 형태로 옛 문서에도 이와 같은 형식의 화포가 보이지 않는다.

몸체에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청나라 함풍(咸豊) 11年(1861) 여름 허난(河南)성 개봉(開封)에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내용도 있으나 마모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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