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꿈이 없던 대학교 시절, 졸업을 앞두고 카피라이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 막막하던 차에 광고업계에서 ‘카피’를 생산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일이라 생각했다. 두 학기 동안 관련 수업을 들었고, 수업 시간에는 나름 인정도 받았기 때문에 은근히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당시만 해도 상당수의 카피라이터들은 등단한 시인이나 문인들이었고, 등단하지 못한 ‘스펙’은 진로를 바꾸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등단이 능사는 아니었다는 걸 알았고 좀 더 치열한 시도조차 하지 못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아직도 카피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제품에 대한 정보를 가장 함축적이면서 집약적으로, 그리고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작업(물론 시대의 트렌드마다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은 참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광고업계에서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수십 년 전, TV에서 ‘피로야 가라!’라는 카피의 광고가 전파를 탈 때의 일이다. 피로를 물리치기 위해 약(건강식품)을 먹으면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는 잘 전달했지만, 결국 판매는 경쟁사 제품의 매출이 컸다. 소위 ‘죽 써서 뭐 준 꼴’이 된 것이다. 이후 제약사 TV 광고는 끊임없이 제품명을 반복하고 있다(이는 지금도 유효한 현상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카피는 있는 것 같은데 앞서 말한 ‘꼴’이 나는 듯싶다.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은 하고 있지만 자꾸만 엇박자가 난다. 전제조건의 전제조건,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제품이 좋지 않다고 카피를 엉망으로 만든다면 카피라이터의 자격이 있을지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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