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정부의 주도로 진행된 공식 이민은 1902년에서야 비롯됐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하기 위해 121명이 1902년 12월 22일 월미도 해상에 떠 있는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나가사키를 거쳐 겔릭호(Gaelic)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입국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 최초의 공식 이민이고, 한국이민사박물관 건립의 근거가 되며, 인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인하대학교 설립의 단초가 되는 하와이 이민이다.

포와(布哇)는 하와이를 가리키는 한자식 표기다. 먹고 살기 위해 감내해야 했지만, 신문물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하와이를 향해 출발한 121명은 출발하기 전 인천에서 무엇을 했을까?

하와이 이민의 중요 인물들, 그들과 관련한 근대문화재와 더불어 최초 하와이 이민자들의 1902년 12월 22일 이전의 행적을 좇아가 보도록 하자.

#하와이 이민의 배경
19세기 말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해 설탕의 수요가 급증했고, 1876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 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돼 하와이 물품을 미국 본토에 면세로 공급하게 되자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업이 번창하게 됐다. 농장의 노동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포르투갈, 노르웨이, 독일 등지에서 노동력을 충

▲ 동양합동광업회사 사옥과 데쉴러 사택
원했지만 경비 절감을 위해 싼 노동력을 찾기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일부 값싼 노동력을 충원할 수 있었지만 1897년 중국인의 미국령 입국이 금지되고 일본인이 노동자의 70%(1902년)를 차지하게 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하면서 또 다른 대체 노동력이 필요했다.

결국 1896년 말 하와이정부는 중국과 일본을 대체하기 위해 대한제국에서 노동자를 데려오기로 했다. 한반도는 1899년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기근이 심해지고, 1901년에는 전국적인 가뭄으로 인해 식량이 매우 부족했다.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가 쌀과 곡물을 대량으로 반출해 감에 따라 한반도의 양곡 사정은 날로 악화돼 갔다. 중국으로부터 쌀 5만 석(1898년)과 안남미 30만 석(1901년)을 수입하고 양곡의 국외 반출을 금지하는 한편,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혜민원(惠民院)을 설치했다. 당시 한반도의 열악한 상황이 백성들을 나라 밖으로 내모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공식 이민의 시작
고종황제가 공식 이민을 결정함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N.Allen)과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W.Dechler)였다. 알렌은 1902년 2월 미국에서의 휴가를 마치고 대한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 어윈(W.C.Irwin)의 요청을 받게 된다.

▲ 미국공사 알렌의 별장

서울에 돌아온 알렌은 고종황제를 알현하면서 한국의 경제사정을 해소하기 위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한국인 노동자를 이민시키는 것을 건의했다. 아울러 이민자를 위한 여권발급 기관을 새로 설치할 것을 건의하면서 이를 궁내부 산하에 두면 여권발급에서 들어오는 돈이 황실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결국 고종황제는 한국인 노동자의 하와이 이민을 결정하게 된다.

알렌은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1984년 미국공사관과 그 외 서양공관의 공의(公醫) 신분으로 입국했다.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황실의 신임을 얻었고, 민영익이 보상한 돈으로 1985년 광혜원을 설립했다. 1887년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을 역임하고, 1897년 주한미국공사겸총영사로, 1901년 주한미국전권공사가 됐다가 190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알렌의 별장은 쇳뿔고개에 있었다. 지금은 인천전도관 건물이 있는 곳인데 한 모퉁이를 둥근 탑으로 쌓아올린, 돔 형식을 띤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경인철도의 우각역 정차장이 별장의 정문 앞에 있었다. 한반도에 감리교를 가장 먼저 선교했던 아펜젤러가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해 익사했는데, 그가 목포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묶었던 곳이 바로 알렌 별장이기도 하다.

유민원의 설치와 함께 1902년 11월 15일 하와이 이민 모집 및 송출과 관련한 사업의 전권을 미국 오하이오주 태생의 데쉴러에게 주는 고종황제의 임명장이 수여되면서 하와이 이민의 본격적인 실무가 시작됐다.

또한 11월 16일 “해외로 수학 유람 및 농공 상업으로 외국에 여행하는 한국인에게는 여행권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유민원(綏民院, 1902년 11월 29일 자 윤치호의 영문 일기에 Yu Min Won으로 표기)을 궁내부에 신

▲ 내리교회와 신학회 회원들
설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서울 계동 한옥에 사무실을 설치한 유민원은 여권 발급을 비롯한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민영환(閔泳煥)이 초대 총재로 취임해 오늘날의 여권 업무와 해외개발공사의 기능을 합한 것과 같은 업무를 담당했으며, 유민원은 1903년 10월 폐지됐다.

#이민자의 모집
본격적인 하와이 이민자 모집에는 데쉴러와 존스 목사의 역할이 컸다.

우리가 가장 먼저 데쉴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쇳뿔고개(우각현)에서 거행된 1897년 경인철도 2차 기공식 사진이다. 데쉴러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가진 모스(J.R.Morse)와 관련이 있다. 1896년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는 운산광산의 채굴권을 따낸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설립해 채굴에 들어갔다. 이때 동양합동광업회사의 재정담당자가 데쉴러였다.

현재 인성초등학교가 있는 곳에는 일본식 저택 여러 동과 함께 단층의 서양식 건물이 일본식 정원으로 조성된, 상당히 큰 저택이 있었는데 이곳이 동양합동광업회사의 본사와 데쉴러의 사택이었다.

 이 건물은 후에 우로꼬라는 일본식 식당으로, 또 영화 제작자 최철(배우 최불암의 아버지)의 가옥으로 사용됐다.

 다시 제일교회의 다비다 모자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1978년 철거돼 현재 인성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데쉴러는 하와이 이민과 관련한 동서개발회사와 데쉴러은행을 운영하다 1905년 북경의 록펠러재단 구매 대행업을 시작했다.

▲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


데쉴러는 이민의 모집과 송출에 관련된 실무를 위해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설립하고 이민자의 재정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데쉴러은행도 함께 설립했다. 이민자 모집은 개항장 제물포를 비롯한 항구 도시와 내륙 주요 도시의 기차역, 시장 등에 모집 광고를 붙이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민자 모집은 지지부진했다. 한국인들은 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집을 멀리 떠나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친척·지인과 헤어져 낯선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특히 조상의 분묘를 버릴 수 없다는 유교적 윤리 의식에 의해 이민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때 이민자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제물포 웨슬리메모리얼교회(현 내리감리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존스(G.H.Jones)였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모두 인천에 도착했다. 감리교와 장로교는 선교활동에 있어 동일 지역에서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지역을 분할하는 예양협정(禮讓協定)을 체결했는데 인천은 감리교 선교 지역이었다.

데쉴러의 요청을 받은 존스 목사는 그의 교인과 주변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고 이민을 권유했다. 서구의 신

▲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
문물과 신종교를 받아들인 인천사람들에게는 서구문물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았을 뿐만 아니라, 신교육에 대한 열망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존스 목사의 이민 권유는 기독교인과 인천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결과 121명의 이민자가 모집됐다.

이들 중 나가사키에서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19명을 제외한 102명의 국내 거주지 분포를 보면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교동 포함)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그 외 지역 6명으로, 인천사람이 84%(86명)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존스 목사가 인천지역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적으로 권유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선발된 121명은 1902년 12월 22일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겐카이마루에 오르기 전, 당시 가장 근대적인 도시인 인천에서 서구문물과 신행정을 경험하게 된다.
<글=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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