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역과 월미도 군용철도.
인천 사람들에게 월미도는 낭만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항구도시이지만 바다를 접하기 어려운 인천에서 그나마 바닷냄새를 만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밤이면 제방을 따라 늘어선 상점들의 불빛과 쉬지 않고 돌아가는 놀이기구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또 한편으로 월미도는 아픔의 공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근대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우리의 뜻에 반하는 조차 경쟁이 벌어졌으며, 그들 사이의 전쟁이 이곳 섬 앞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천과 서울 탈환의 교두보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월미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주민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행궁(行宮)이 들어서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거처를 행궁이라 한다. 인천 앞바다의 보잘것없던 섬, 월미도에 행궁이 설치되면서 이 섬은 역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병자호란의 아픔이 채 가시기 전인 1656년 효종 임금은 유사시 어가(御駕)의 강화도 피난길이 막혔을 경우를 대비하고자 했다.

불과 20년 전 병자호란 당시 청의 병사들이 강화도 피난길을 차단하자 인조 일행은 강화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여지도서(1760)에 나타난 월미도 행궁.
조선 정부는 어가의 강화 피난로가 차단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인천과 영종도를 경유해서 강화도 남단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우회로를 개발했다. 이 우회로는 뱃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어가 행렬이 물때를 기다리면서 잠시 머물거나 유숙할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결국 월미도에 행궁이 들어서게 됐다.

 월미도 행궁은 8칸의 정전(正殿)이 중앙에 위치하고 동서남쪽에 회랑을 둔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임금을 호위하는 병사들의 수직간(守直間)이 별채로 있었다. 그러나 행궁이 지어진 이후 병자호란과 같은 급박한 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 건물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열강들의 조차 경쟁
역사 속에서 월미도가 다시 부각된 것은 개항 이후 근대 열강들이 이 섬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유린했던 프랑스군이 월미도를 지나 한강하구로 접근하면서 이 섬에 ‘로즈(Roze)’라는 해군 제독의 이름을 붙였다. ‘로즈 제도’는 서구열강에 처음 소개된 월미도의 이름이었다.

조선과의 수교 이후 대륙진출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부산의 절영도를 비롯한 조선의 각 지역에 석탄고를 건설했다. 일본 본토에서 요동과 만주지역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중간 지점에 증기선의 원료인 석탄을 보급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월미도 유원시설이었던 ‘조탕’.


1882년 일본 해군은 월미도 북서쪽 해안 구릉지의 행궁 터를 불법으로 점유해 석탄 창고를 설치했고, 1891년에는 그동안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던 월미도 저탄고 부지 16만198㎡를 합법적으로 조차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과는 반대로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던 러시아도 1896년 월미도 서남지역 4만4천297㎡를 조차해 저탄고와 부두, 수도관을 설치했다. 향후 이 섬에 병원, 연병장, 사격장을 추가로 설치해 명실상부한 해군기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러시아 저탄고 시설은 일본군에 흡수됐다.

#제물포 해전
월미도의 조차 경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반도를 사이에 둔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점차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1904년 2월 9일 인천항에 정박해있던 러시아 함선을 일본 함대가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른다. 러시아의 전함 바리야크호와 코레이츠호는 팔미도 부근에서 일본 함대와 전투를 벌였고, 월미도 앞바다로 돌아와 자폭해 결국 바다에 가라앉았다.

곧이어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점유하려는 목적에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이에 따라 월미도는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월미도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민가와 토지를 수용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섬 밖으로 철수시키고 섬 전체를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특히 월미도를 군수물자 수송의 발판으로 삼았는데 소월미도에 하륙장(下陸場)을 설치하고, 여기서 인천역

▲ 월미도에 주둔한 미군부대.
까지 철도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1900년 완전 개통된 경인선과 새롭게 건설 중이던 경의선을 이용해 전쟁이 한창인 만주지역까지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다 쉽게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 파라다이스
1922년 4월 인천역 북쪽 해안에서 월미도 동쪽 해안까지 약 1km의 석축 제방도로가 완공됐다. 이 제방도로는 당시 월미도에 조성되고 있던 조탕 등 유원시설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듬해 월미도 유원지가 조성되자 인천역과 월미도 사이에는 ‘승합차’라고 불리던 셔틀버스가 운행됐다.

당시 월미도는 바닷물을 끓여 목욕물로 사용했던 대조탕(大潮湯)을 비롯해 해수욕장, 호텔, 식물원 등 각종 위락시설이 밀집해 있던 인천 유일의 유원지이자 수도권 최고의 관광지였다. 월미도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기 위해 조선 전역에서는 물론, 일본 본토에서도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고, 월미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휴양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이면으로는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제의 속내가 숨어 있었다. 조선 병합에 성공한 일본은 대외적으로 그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자국민들에게 大일본제국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관광’을 활용한다. 조선 제일의 도시 경성의 배후도시이자, 병합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인천은 그들에게 있어 둘도 없는 관광지이자 교육과 계몽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근대산업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던 인천은 견학과 시찰의 대상은 됐지만, 관광의 주요 목적인 즐길 수 있는 공간은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에 일본은 유희와 위락의 장소로 월미도를 주목했고, 1923년 설립된 월미유원회사는 월미도에 조탕을 비롯한 각종 위락시설을 건설했다. 일제강점기 유희와 낭만의 공간 월미도. 정작 그곳은 식민도시 인천에 만들어진 식민지 파라다이스일 뿐이었다.

#전쟁의 아픔 그리고 다시 맞이한 평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국군과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영남지역에서 고착화돼가고 있던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인천 상륙에 앞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교두보였기에 유엔군은 9월 10일부터 월미도 전역에 공습을 실시한다.

그리고 9월 15일 새벽 월미도 서쪽 해안인 ‘그린비치’로 유엔군 선발대가 상륙해 월미도를 확보하고 이를 발판으로 월미도 제방길 동쪽 끝 부분의 ‘레드비치’와 낙섬 인근의 ‘블루비치’에 상륙하면서 인천을 탈환할 수 있었다.

▲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한국전쟁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인천상륙작전이었지만 당시의 공습으로 피해를 본 것은 북한군만은 아니었다. 당시 월미도에 거주하던 주민 다수가 피해를 보았으며, 전쟁이 끝났어도 섬 밖으로 피난했던 이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을에는 미군들의 막사가 들어섰으며, 미군들이 떠나자 우리 해군이 주둔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여전히 월미도 대부분은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으로 남게 됐다.

2001년 섬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사령부가 이전하면서 월미도는 50여 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부대가 있던 자리는 공원으로 꾸며져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바닷가 놀이공원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룬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 것이겠지만, 월미도가 겪었던 전쟁의 아픔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 월미도 교량통행인감 전면(왼쪽)·후면.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인 1904년 2월 21일, 일본은 서울과 신의주 사이에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를 설치했다. 러시아와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던 만주까지 군수물자 운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경부철도는 1901년 착공해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경인철도는 이미 개통됐기 때문에 서울에서 의주까지 철도가 놓인다면 일본 본토에서 부산과 인천을 경유해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보급할 수 있었다.

인천항의 경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데다 접안시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소월미도를 군수품 전용부두로 확정했다. 1905년 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는 인천역에서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기 시작해 이듬해 2월 개통했다. 돌을 바닷속에 메우고 나무로 다리를 세운 목조 철교였다.

개통 축하식에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부통감, 조선군 사령관 등이 참석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철교를 오가는 군용열차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교각 주위로 토사가 쌓여 선박 운항에 지장을 줬기 때문에 결국 1911년 철거됐다.

이 자료는 인천역과 월미도를 연결했던 일본군 군용철교의 통행을 증명했던 인감으로 가로 6.1㎝, 세로 4.4㎝, 두께 1㎝ 크기의 나무재질이다.

앞면에는 ‘임시군용철도감부인(臨時軍用鐵道監府印)’의 아홉 글자가 음각돼 있고, 뒷면에는 ‘인(印) 제372호 월미도교량통행인감(月尾島橋梁通行印鑑)’이라는 15자가 먹으로 쓰여 있다.

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 주요 시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제작했으며, 뒷면에 발행 번호와 출입통제 시설을 그때그때 먹으로 기입했다.

당시 월미도의 군용철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이 같은 목제인감을 반드시 제시해야만 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이 끝났어도 월미도는 일본군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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