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지금은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보편적인 음료이지만, 산골 마을 소녀였던 나에게는 달콤하고 톡 쏘는 신기한 그 맛을 경험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면 김밥 또는 삶은 달걀과 함께 세트로 마셨던 추억의 음료였다. 속이 더부룩할 때면 시원스레 터져 나오는 트림과 함께 뱃속을 편안케 해주던 소화제이기도 했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라는 노래가 있다. 재미 삼아 들었던 노래지만, 들을 때마다 왜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다는 표현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앞뒤의 가사를 보면 그다지 의미 있는 내용은 아닌 듯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사이다 하면 인천이 연상되었음은 분명하다. 대체 인천과 사이다는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사이다의 어원과 유래

 우리가 사이다(cider)라 부르는 이 음료의 정확한 명칭의 표현은 소다(soda)이다. 사이다의 어원은 라틴어로 독주(毒酒)를 의미하는 시케라(sicera)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과의 과즙을 원료로 해서 만든 사과 술을 가리킨다. 사과 술 시케라가 프랑스로 전래되면서 시드로(cidre)가 됐고, 영국에서는 사이다(cider)라 표기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이다’는 무색투명한 탄산음료를 말하지만, 외국에서 ‘사이다’를 주문하면 사과 술이나 사과주스가 제공된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이다를 마시려면 ‘소다 팝(soda pop)’ 또는 ‘레몬라임 소프트드링크(lemon-lime soft drink)’로 주문해야 낭패를 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과주스 사이다가 어떤 경로로 탄산음료 사이다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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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3년 아직 서구의 문물에 익숙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통상압력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미국 페리제독 휘하의 미군 병사들에 의해 사과 술 사이다를 맛볼 수 있었다. 1868년 영국인 존 노스와 레이가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에 ‘노스 앤 레이’ 상회를 열면서, 사과와 파인애플 맛이 나는 복합향료를 사용해 ‘샴페인사이다’라는 이름의 탄산음료를 개발했다. 이로부터 탄산이 가미된 주스를 통칭해 사이다라 부르기 시작했고,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탄산음료 사이다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인천, 사이다를 처음 맛보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다 공장은 1905년 2월 개업한 인천탄산수제조소이다. 1887년 인천에 들어와 잡화상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했던 일본 상인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가 화정 2정목 28번지(지금의 신흥동 2가 27번지 일원)에 개업했던 회사다.

 이 회사에서 생산했던 사이다는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일본인은 물론 조선 사람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는 사이다에 ‘별표(星印標)’라는 상표를 붙였고 중앙에 커다란 별이 그려진 로고를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이다 시장을 석권했던 ‘스타사이다’의 탄생인 것이다. 청량음료 사이다의 인기에 힘입어 1910년 5월에는 나까야마 우노키치(中山宇之吉)가 ‘라무네제조소’를 설립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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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라무네’는 물에 설탕과 포도당, 라임향 등을 첨가해 만든 레몬 에이드의 일종이었다.

 인천에서 시작된 사이다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1917년에는 평양에 평안광천소가 설립돼 ‘금강사이다’를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에는 모두 58개 사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사이다가 지역마다 유통되고 있었다.

 당시 사이다 공장의 대부분은 일본 자본에 의해 경영됐으며, 조선인이 운영했던 공장은 고흥찬(高興讚)이 경성의 원동(苑洞; 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세웠던 ‘감천사’가 유일하다. 1937년 2월 감천사와 인천탄산수제조소 등 8개 업자가 연합해 경인합동음료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조선 최대의 음료 회사가 됐다.

  #귀하신 몸, 사이다의 인기

 밀수(蜜水; 꿀물)나 화채 외에는 별다른 마실 거리가 없었던 조선인들에게 달콤한 맛에 코끝을 톡 쏘는 사이다는 특히 여름철 음료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빈 병의 회수가 원활하지 않아 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16년 9월에 발행된 미국 월간지 「월드 아웃룩」이란 잡지에 인천탄산수제조소의 별표 샴페인사이다 광고를 붙인 열차 사진이 게재됐다. 지금처럼 다양한 광고매체가 없었던 시절 열차에 전면광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사이다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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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6월 개최된 인천포목점조합 운동회에 사이다 한 상자가 기증되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고, 기독교부인회 인천지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활 물품을 나눠줬는데 그 가운데 사이다가 포함됐다고 한다. 별표사이다 즉 ‘스타사이다’의 인기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해방 직후인 1946년과 1947년 각 일간지에는 "여름철 사이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협잡배가 회사의 상표를 도용해 위조 스타사이다를 제조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인합동음료주식회사의 광고가 게재될 정도였다. 이처럼 사이다는 여름철이면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었다.

  #별표에서 칠성으로

 인천탄산수제조소를 합병한 경인합동음료주식회사는 1937년 설립과 동시에 감천사의 사장 고흥찬이 대표로 선출됐고, 해방 후 적산기업이 되자 손욱래가 이를 불하받았으며 1954년에는 김원만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일본 강점기에 유명했던 ‘스타사이다’는 해방 후에도 그 명성을 이어갔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사이다 생산업체가 난립해 있었지만, 그중 인천의 ‘스타사이다’와 서울의 ‘서울사이다’가 각축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50년 5월, 서울 동방청량음료의 ‘칠성사이다’가 출시되면서 인천의 ‘스타사이다’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0년대 초 새로운 맛을 가미해 ‘뉴스타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지만, 경영난을 겪으면서 시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75년 주류회사 진로에 인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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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연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진로에서는 국산 양주시장이 활성화되자 토닉워터 등 믹스 음료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경인합동음료주식회사를 합병했고, 인천탄산수제조소로부터 70년의 역사를 간직해온 스타사이다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다에 붙었던 별 모양 로고는 이후 생산되는 사이다에 지속적으로 활용됐다. 금성, 동광, 월성, 삼성, 칠성 등 시대를 풍미했던 사이다의 상표에는 별 모양이 하나 이상 꼭 붙어있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다는 노래 가사가 등장할 정도로 인천의 사이다가 전국을 석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빛나는 별표의 명성과 흔적을 이제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작은 상표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남는다.

<김상연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경인사이다 상표

 경인음료주식회사에서 생산한 ‘경인사이다’ 유리병에 부착됐던 상표로 가로 9.1㎝ 세로 7.9㎝인 상표 중앙으로 ‘스타사이다’의 전통적인 로고였던 별표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 그려진 별표는 채색된 별 모양 안에 흰색의 작은 별이 들어가 스타사이다의 그것과 일치하는데 이로 미루어 경인사이다는 스타사이다의 명맥을 이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상표 하단에는 제조사인 경인음료주식회사가 표기돼 있다. 1950년대까지 스타사이다를 생산했던 회사는 경인합동음료주식회사였는데 1960년대 들어 경영난을 겪으면서 경영자가 계속 바뀌었고, 회사명과 상표를 변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회사명 윗부분에 첨가물의 성분이 표기 돼 있는데 인공감미료인 사카린과 둘진(DULGIN)이 각각 0.03%와 0.015%로 가미됐다. 그중 둘진은 합성감미료의 일종인 둘씬(DULCIN)의 오기로 보인다.

 상표의 좌·우측에 ‘인세(仁稅) 제1호’, ‘경보사(京保社) 제2호’라는 허가번호가 있는데 인세는 인천세관, 경보사는 경기도 보건사회국의 약자로 보인다.

 이 자료는 2013년 유조파 선생이 기증한 것으로 기증자의 부군인 고(故) 김재은 선생이 생전에 보관해 둔 것이라 한다.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 인천상업학교 야구부 출신으로 서예가 동정 박세림 선생에게서 서예를 익힌, 인천 체육계와 문화계를 두루 거친 인물로 그가 버리지 않고 모아뒀던 많은 도서와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평소 인천과 관련된 것이라면 조그만 자료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았던 김 선생과 박 선생이 남기신 소중한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해주신 유조파 선생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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