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문학산 정상이 50년 만에 시민에게 개방된다. 인천 지역사회는 벌써 기대에 부푼 분위기다. 해발 200m가 조금 넘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을 이처럼 반기는 까닭은 문학산이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산은 1883년 개항되기 이전까지 인천의 중심지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던 곳이다. 그동안 문학산은 지역의 상징이면서 일명 ‘배꼽산’이라고도 불리 울 만큼 인천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다.

 # 인천의 중심, 문학산

 오늘날 인천은 지리적으로 도서해안과 내륙으로 구분되며, 이 중에 내륙지역은 한남정맥(漢南正脈)을 기준으로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한남정맥은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에서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낮은 구릉성 산지다. 정맥의 인천구간 동쪽은 인천시 계양구와 부평구, 부천지역이, 서쪽에는 서구, 중구, 동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가 위치한다.

이 중 서구가 자리한 지역의 상당부분은 과거 청라도, 장금도, 율도 등 소규모 도서가 분포하고 있었던 곳을 매립하면서 육지화 된 곳이다. 그래서 본래의 지형을 기준으로 보면 한남정맥 서쪽에서 문학산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의 서남부지역만이 내륙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해안선이 지금처럼 변화하기 전 인천은 도서해안과 문학산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부내륙, 그리고 계양산 일대의 동북부내륙 등 3개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천의 산들은 높지 않지만 지역별로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냈고 근대 이전 행정구역의 기준이 되었다. 오늘날 계양구와 부평구가 자리한 인천 동북부지역이 부평으로, 문학산 일대는 원인천으로 나뉘어졌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인천시의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문학산 일대는 지리적으로 인천의 가운데가 아니고 역사적으로도 과거 부평, 강화와 함께 인천 지역에 존재했던 중요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의 역사적 연속성을 고려해 보면 역사 지리적으로 문학산 일대는 인천의 중심이었다고 하겠다.

 # 인천 역사의 출발점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인천은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아직 분명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인천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인천은 비류(沸流)가 내려와 정착한 미추홀(味鄒忽)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 전기 문장가인 강희맹의 문집에 실린 「인천부승호벽상기(仁川府陞號壁上記)」에 "인천 고을은 생긴 지 지금 천 백년이 된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인천 역사의 시작을 최소한 3~4세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학산 일대에는 미추홀 이전부터 사람들이 생활했던 곳이다. 인류가 지나온 변천 과정을 역사라고 본다면 이 곳은 선사 시대부터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었다. 바다로 돌출해 있어 서쪽과 남쪽이 바다에 접해 있는 이 곳은 내륙과 해양의 입지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지금은 해안 매립으로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과거 문학산 주변은 해안가에 갯벌이 펼쳐져 있고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풍부한 먹거리를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곳이다. 아울러 생활에 유리한 낮고 완만한 구릉도 함께 펼쳐져 있어 이 일대는 어로·수렵·채집·경작을 주요한 생계수단으로 하는 선사인들에게 좋은 생활 터전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향교에서-바라본-문학산(남구청-제공).jpg
지금까지 주로 문학산의 동쪽 지역에서 예는 많지 않지만 다양한 선사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문학산 동쪽 구릉에서는 뗀석기의 일종인 찍개 1점이 출토되어 이 일대에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생활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구월동에서는 신석기시대 화덕자리와 구덩이 유구가 확인되었고, 선학동에서도 신석기시대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앞선 시대 보다 남아있는 유적이 많다. 학익동과 문학동 일대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했고 청학동과 옥련동에서는 간돌 도끼와 민무늬 토기 편 등이 채집되어 문학산 일대가 당시 청동기인들의 생활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구월동 선수촌 부지와 문학경기장 부지에서는 모두 50여 기의 집자리가 조사되어 당시 이 일대에 일정 규모의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 문학산을 중심으로 대규모 취락을 이루고 고인돌을 만들었던 집단은 이후 미추홀로 대표되는 새로운 역사 전개에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수준에서 당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 미추홀과 문학산성

 문학산성은 문학산 정상부에 쌓은 석축 산성이다. 둘레 577m로 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 산성은 정확히 언제 쌓았고,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조선전기 읍지에 고성(古城)으로 표시되면서 당시에는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학산성은 18세기 중엽 「동사강목」과 「여지도서」등에 비류의 성이라 전해진 후부터 문학산성이 곧 미추홀의 옛 성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다. 성내의 우물을 비류정이라고 부르거나 산 정상에 미추왕릉이 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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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지금까지 문학산성이 미추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산성의 축조시기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20여 년 전 간단한 지표조사만 이루어진 상태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출토 유물 등의 자료로 본다면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산성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산성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연차적으로 정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한편 미추홀과 직접적인 연관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문학산 일대는 고대인들의 생활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학산 동쪽 구릉, 즉 구월동, 도림동으로 이어지는 저평한 구릉 지대 곳곳에서 백제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고, 구월동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 자리에서는 본격적인 삼국 시대가 펼쳐지기 이전 한반도에 형성된 정치체인 마한(馬韓)의 무덤도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산 일대를 배경으로 펼쳐졌을 고대 인천의 모습도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있어 답답한 모양이다.

 # 인천 관아와 학산사원 그리고 문학산

 조선시대 읍지에 문학산은 남산(南山)으로 전한다. 이 곳이 남산으로 불렸던 것은 문학산 북쪽에 인천의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중엽이후로, 조선 숙종 대 문학산 북록에 세워진 학산 서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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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문학산의 이름의 유래가 된 학산 서원은 정확한 위치조차 찾을 길 없고, 수 백년 문학산을 마주 바라보았던 인천 관아도 본래의 자리가 아닌 곳에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학산이 인천의 중심이라 이야기 해왔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대접은 하지는 못한 듯하다. 앞으로도 그러기에는 쉽지 않은 형편이다.

▲ 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문학산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각종 산업시설과 주택들이 들어섰고 근래에는 고속도로, 경기장등이 건설되면서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있던 문학동 일대는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빈 땅을 찾기 어렵다.

문학산성이 위치한 산 정상부도 1965년부터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 문학산 일대는 지난 2천 년 동안 인천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곳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도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50년 만에 이루어진 문학산 개방이 앞으로 인천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라는 명성에 부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글=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학익 고인돌(鶴翼 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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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의 한 형태로 지상에 큰 덮개돌이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 무덤방(墓室)이 위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인돌이라는 명칭은 덮개돌 아래에 돌을 괴는 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되었지만 일부는 집단의 의식을 행하는 제단이나 기념물로 사용된 것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은 유럽·인도·동남아시아·일본 큐슈·중국 동북지역 등 전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4만여 기가 확인되고 있다. 강화를 포함한 인천에도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학익 고인돌은 본래 인천시 남구 학익동의 (구)인천구치소 부근에 있었는데 자유공원으로 이전된 후 1990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이전·복원 되었다. 이 고인돌은 높이 30㎝ 내외의 고임돌위에 부정형한 타원형의 덮개돌을 덮은 탁자식 구조를 띠고 있다. 고임돌의 한쪽은 2개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전면과 후면의 막음돌은 없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당시 간돌화살촉과 돌칼 등이 출토 되었다고 전한다.

 인천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는 학익 고인돌은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만 청동기시대 인천 내륙지역에 고인돌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 인천지역의 고인돌은 강화도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서구 대곡동과 문학산 일대에 강화도와 비교할 만한 고인돌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문학산 일대에는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3기, 문학동에 1기 등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학익 고인돌을 포함해 4기만 남아있다. 학익 고인돌의 크기는 높이 94㎝, 길이 260㎝, 너비 170㎝ 두께 60㎝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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