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민사박물관(인천시립박물관 분관)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에게 어려운 난제 중 하나가 사할린 한인들의 이주역사였다. 한민족의 이주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사할린 한인의 이주역사를 러시아지역 또는 일본지역에 포함해야할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다.

700만이 넘는 재외동포들 중에서 모국으로의 귀국을 가장 열망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들의 이주역사의 독특함을 들어 별도의 이주역사로 기술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2015년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조국이 광복을 맞이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자신들의 국적인 러시아와 모국이 수교를 맺은 지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아울러 1990년대 이후 진행되어 왔던 영주귀국과 관련한 일본정부의 지원이 종료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할린 이주역사의 특징은 반복되는 이산이라 할 수 있다. 1939년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동원에 의해 첫 번째 이산을 경험하고, 1944년 소위 이중징용이라 불리는 전환배치를 통해 두 번째 이산의 고통을 맛보았다.

그리고 항상 꿈꿔왔던 영주귀국이 실현되면서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세 번째 이산이 진행 중에 있다. 고단했지만 모국을 잊지 않고 한민족으로서 명예로웠던 한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첫 번째 이산, 조선인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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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45년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 경로(지도·사할란주한인회 소장)

 만주사변(1931)을 시작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됨에 따라 일본제국주의는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 공급을 위해 전면적인 국가통제와 동원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총동원법(1938)을 공포했다.

이 법과 하위법령에 의해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물적자원에 대한 총동원정책이 실시됐다. 인력동원은 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로 대별되는데, 일본군 위안부는 1931년부터, 기타 인력은 중일전쟁(1937) 발발이후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정부의 통계자료가 정확하지 않아 조선인 강제동원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대일항생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연구에 따르면 이 기간 동원된 인력은 위안부 피해자를 제외하고, 1인 당 중복 동원을 포함해 총 782만7천355명이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강제노동을 강요당했으나 피해보상은 물론 약속받은 급여조차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급여 및 수당, 예·저금을 공탁해 현재까지 지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1990년대부터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으나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패소·기각됨으로써 개인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인 노무동원

 노무동원이란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동원된 각종 산업의 노무자를 가리킨다. 한반도·일본·중국 및 만주·남사할린·동남아시아·남양군도 지역의 군수공장·군공사장·토목건축현장·석탄광산·금속광산·항만운수관계·집단농장 등에 동원되었는데 석탄광산에 동원된 사례가 가장 많았다. 할당모집, 국민징용, 관알선 등의 방식으로 진행된 노무동원은 한인을 고용하려는 일본 기업들이 신청한 인원을 일본정부가 조정·배당하고, 조선총독부의 조정을 거쳐 확정하였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자행한 정책적·조직적·집단적·폭력적 동원이었다.

할당모집(1938~1945)은 조선총독부가 노무자의 모집지역과 할당인원을 결정·허가하고, 지역 행정기관이 기업 모집담당자와 함께 노무자를 송출하는 방식으로 수송책임을 행정기관과 해당 기업이 함께 담당했다. 국민징용(1939~1945)은 국민징용령 및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등록한 자 중에서 일본정부가 선정해 징용영장을 교부해 송출하는 방식이다.

 행정기관이 선정에서 수송은 물론 식량 조달과 인력 관리 등을 직접 담당했다. 초기에는 기술자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운용되다가 1944년 이후에 일반 노무자로 확대됐다. 관알선(1942~1945)은 할당모집과 국민징용의 중간 단계로 사업자(또는 대행단체)가 신청하면 조선총독부가 모집지역·인원을 결정하고 조선총독부와 지방행정기관과 경찰, 조선노무협회, 직업소개소 등이 협력해 노무자를 선정·송출하는 방식으로 수송책임도 각 기관이 공동으로 담당했다.

  # 동토의 땅, 사할린

 사할린(Сахалин)은 남북 길이 950㎞, 폭 160㎞, 면적 약 72,492㎢의 섬으로 쿠릴열도와 함께 러시아연방의 사할린주에 속해 있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54만6천695명의 인구 중 한인은 2만9천592명(5.41%)로 러시아인(46만778명, 84.3%) 다음으로 많다.

 1875년 제정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후 유배지로 사용되다가 1905년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러시아 관할의 북사할린과 일본 관할의 남사할린으로 분단됐다.

남사할린은 화태(華太, からふと)로 불리며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1920년대 전후에는 러시아의 적백내전을 틈타 북사할린을 점령하기도 했다. 남사할린이 식민지에서 일본 본토로 편입되는 시기를 전후해 한반도에서 많은 한인들이 강제동원되어 유입됐다.

 1945년 소련군이 사할린에 진주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함으로써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됐으며, 현재는 러시아연방의 영토이다.

 1983년 대한항공 747기가 서울로 오는 도중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269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사할린이 대한민국에 알려졌다. 소련 해체 이후 한·러·일적십자의 노력으로 사할린 한인들이 국내로 영주귀국하게 되면서 사할린과 대한민국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할린의 주요산업은 광업이며, 그 밖에 석유, 석탄, 천연가스, 펄프, 제지업, 어업과 어류가공, 임업·제당업, 목축 등이다. 주요 항구로는 코르사코프, 홈스크, 우글레고르스크 등이 있다.

  # 사할린으로의 강제동원

 일본의 입장에서 남사할린은 석탄과 목재 등 자원의 보고이자 소련과 대치한 국경지대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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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주 니시-사쿠탄 탄광 전경(사할린주역사문서보관소 소장)
인접한 쿠릴열도와 함께 태평양방어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1905년 남사할린을 점령한 후 일본정부는 자원의 개발과 확보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였다. 일본을 통해 사할린으로 투입된 한인의 수는 점차 늘어나 1920년대에 중국인을 초과하였고, 북사할린으로부터 넘어 온 한인의 수도 점차 늘어나 1935년에는 그 수가 7천 명을 넘어섰다.

 남사할린에 한인이 크게 증가한 것은 강제동원 때문이다. 1939∼1943년 집단적으로 유입된 노무자가 1만6천113명이었고, 이들이 한반도에서 불러들인 가족을 포함해 1945년 6월에는 4만3천 명에 달했다.

 사할린 한인 대다수는 농민출신으로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탄광, 벌목장 등의 생산현장과 비행장 건설, 군용도로 및 철도건설 등의 군사시설 공사현장으로 배치되어 혹한의 기후와 불의의 사고, 민족차별, 배고픔 등과 싸워야 했다.

 한인 노무자들은 석탄산업에 1만509명(65%), 금속산업에 190명, 토목건축에 5천414명이 일하였는데, 탄광종사자가 가장 많았고 특히 갱내노동의 비율이 높았다. 또 삼림장 및 제지공장, 수산업, 농업 등에도 종사했다.

 일본정부가 남사할린 탄광에 관심을 갖고 진출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채탄에 관한 조사작업을 거쳐 수송을 위한 철도와 도로가 마련되고 가라후토청(華太廳)의 정책적 지원 아래 1940년부터 대기업이 진출했다. 일본이 1945년까지 남사할린에서 가동한 탄광은 56개소였으며 한인이 취로한 탄광은 36개소였다.

지역적으로는 우글레고르스크와 홈스크지역 등 서쪽 해안을 따라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동쪽 해안에 있는 레오니도보가 많았다. 전시 인력동원에 의해 1940년부터 한인 탄광부의 숫자는 증가했으나 일본정부의 자원 확보 정책에 따라 한인이 소속한 탄광의 수는 감소되는 현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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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강제동원돼 사할린 탄광에서 노역한 광부 이규남, 사할린주 이중징용 피해자유가족회보(박승의 소장), 결전 포스터(부평역사박물관 소장).

 # 두 번째 이산, 전환배치

 이중징용은 한국에서 사할린을 강제동원된 한인들이 다시 일본의 큐슈섬과 이바라기현에 소재한 탄광으로 전환배치된 것을 가리킨다. 일본정부는 국가총동원범과 국민징용령 등 인적·물적 자원의 통제 및 운용에 따른 법적 근거에 의해 노동력의 전환배치를 했다.

 연합군의 제공·제해권에 들어가게 되면서 채탄도구와 석탄 운반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일본정부는 1944년 8월 11일 각의결정 ‘화태 및 쿠시로 탄광근로자, 자재 등의 급속전환에 관한 건’을 근거로 사할린 노동력의 전환배치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남사할린에 가동 중이던 탄광 26곳 중 가동탄질이 우수하고 채탄규모가 큰 서해안 탄광 14곳이 정리되고 한인 3천 명과 일본인 6천 명, 그리고 생산자재가 일본으로 긴급 배치됐다.

 8월 19일부터 3일간 징용령을 받고, 8월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일본의 후쿠오카 17곳, 후쿠시마 1곳, 나가사키 4곳, 이바라키 4곳 등 총 26곳의 탄광으로 전환배치됐다. 당초 3천22명이 징용령을 받았으나 입산한 한인은 3천191명이고, 167명의 배치 작업장은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중징용은 가족원호와 징용원호를 내세운 회유와 경찰관의 승선이라는 감시 및 통제를 통해 진행됐다. 사할린보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사고사도 빈발했다.

 전환배치의 큰 후유증은 이산이다. 가족을 동반한 사례는 후쿠시마지역에 배치된 노무자 149명과 가족 125명이 유일하다. 가족을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문서에도 가족수송계획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중징용광부 유가족들은 생활고, 민족적·사회적 차별, 가정의 해체에 따른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가장의 부재로 유소년기를 결손가정에서 보낸 유가족들은 사회적 차별을 당했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도 겪어야 했다. 일부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사할린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당시 사할린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한반도로 귀국해 이산가족으로 남게 됐다. 이들은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막연한 기다림만 계속하다가 일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은 개인적으로 한탄하거나 자책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할린주 한인 이중징용광부 유가족회(회장 서정길)’를 결성해 적극적으로 원인 및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계속)

-글=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광복 70주년과 한러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사할린 한인의 망향가> 특별전을 오는 12월 31일까지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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