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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겨울이다. 겨울에게서 한 수 배운다. 옛 시인은 북풍한설이라고 했다. 바깥은 몰아치는 한파이지만 내면은 깊어지는 시간이 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싹 돋아 꽃 피어나는 봄이 명랑이라면 폭염과 장대비가 내리꽂히는 여름은 질풍노도의 강타이다. 부풀어 성숙하고 제 색깔을 내보이며 비울 때를 알아가는 가을은 안정화 시기이며 갈무리한 것들을 보듬어 지혜로워지는 겨울은 발효를 거쳐 숙성되어가는 시간이다.

 지난 주말에 숙부님 팔순 생신이 있었다. 아버지 형제분은 3남 2녀이고 팔순을 맞은 숙부님은 아버지 바로 아래 아우님이다. 어려웠던 시절에 태어나 성실히 살아오셔서 오늘을 일군 숙부님이라 축하 자리에서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세상에 내세울 거창할 것 없는 생애였기에 일상이 뉴스로 중계되는 일이 없는 갑남을녀로 한 세상 사셨지만 성실로 선하게 쌓아온 팔순은 빛이 났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 해도 될 만큼 산 높고 골 깊은 산골 마을이 아버지 고향 동네다. 유일하게 고향을 지켜온 숙부님은 천수답과 비탈밭을 가꾸며 부지런하셨고 슬하에 5남매를 모두 도시로 보내 공부시켰다.

숙부님의 거칠어진 손바닥을 보며 감사해하는 사촌 동생들이 팔순 식장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한 핏줄로 뻗어 나간 이들이 다 모이고 보니 먼저 가신 큰고모님이 그립고 나와 나이 차이가 불과 3살인 막내 고모는 오전에 혈액 투석을 받고 왔다고 해서 가슴이 아팠다.

철없는 둘은 고모 조카라기보다 자매 같아서 잘 어울려 놀았고 많이 싸우기도 했던지라 투석을 하는 막내 고모가 마음이 쓰였다.

 사람의 생애는 단계별로 주기를 거치며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계별 영역별 경향별 경험별 등등 생애주기에 따라 일정한 단계를 거치면서 과정별로 준비하고 대처하고 수행해야 하는 일까지도 조목조목 짚어 준다.

 그러면 생애주기를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하고 목표치에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마음을 자극해 자꾸만 불안감을 키워 날을 세우는 일은 좀 무뎌도 괜찮을 성싶다.

비교 경쟁에 대범해질 필요가 있겠다. 큰 몫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에 현재의 전적인 희생 강요는 찬성하고 싶지 않다. 행복한 현재가 쌓이고 쌓여서 넉넉한 추억이 되고 행복한 노년이 된다고 생각한다. 느리지만 우직하게 노력과 성실이 함께 가는 평생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묵묵한 실행으로 보여준 숙부님의 팔십 생이 채근담으로 와 닿는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사회적 활동도 신체적 활동도 기능도 감각도 감소하고 저하되고 감퇴하여 퇴화의 과정을 밟는다.

 내려놓을 것, 나눌 것, 견딜 것, 마무리 할 것에 대한 준비와 수용이 필요해진다. 겨울에 해당하는 노년기의 지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기가 아닐까 싶다.

 아버지 형제분들은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해 뜨고 달 뜨는 시각을 거스르지 않고 봄 지나 여름 맞고 가을 이어서 겨울이 되도록 세월을 쌓아왔다.

 잎 떨군 나뭇가지처럼 겉은 앙상해도 결실을 내어준 논밭처럼 황량하고 쓸쓸해 보여도 잘 갈무리해 둔 세월이 있어서 내면이 풍요롭게 깊어지는 겨울이다.

삼형제분의 머리는 백발로 연륜을 보여주고 과묵한 성격이라 말이 별로 없어서 일견 덤덤해 보이기도 하지만 속정 깊은 우애가 단단해 우리 후대 자식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아버지 형제분들은 서로 험담하거나 탓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숙부님의 맏딸인 사촌여동생의 말에 모두들 "맞아 그랬어. 서로 험담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삭아져 오는 동안 지나간 모든 것이 부드러워졌다. 후대에 나도는 풍문이 훈풍이 될 수 있게 사셔서 팔순자리에 좌정한 숙부님이 감사하고 세월은 잘 다스려서 발효로 익어가는 시간임을 보여준 두 분 숙부님도 숙모님도 아버지도 맏종부 어머니도 막내 고모도 번성한 사촌들과 내 형제들도, 함께 모인 숙부님의 팔순이 따뜻한 겨울날 하루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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