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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영국 런던에서 대학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여학생은 어릴 적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빠의 직장을 따라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는데,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다고 했다. 대학생활을 하던 중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모임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돼 반가운 마음에 그 모임에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차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 다른 참석자들에게서 "길거리나 캠퍼스에서 한국인 선배를 만났을 때 왜 깍듯하게 인사하지 않느냐"는 핀잔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이후 그 학생은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왜 선배가 후배에게 함부로 대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지나친 서열 중심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나이와 계급(직급) 등에 따라 선임·후임이 정해지면 후임은 선임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이 일반화돼 있는데, 이는 매우 불합리하며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갑질’들도 이런 잘못된 ‘서열문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서열이 높은 사람은 서열이 낮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의식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한국인만 모르는 대한민국」의 저자이며 대표적 지한파로 통하는 외국인 중 한 사람인 이매뉴얼 패스트리치(한국명 이만열) 경희대 교수는 한국의 독특한 ‘갑질문화’는 일제식민지와 군대문화의 잔재라고 지적했다. 일제가 전략적으로 일부 특권층을 만들어 내 이들과 서민들 간 소통을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군대문화 역시 갑질의 뿌리라고 지적했다. 군사통치 하에서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 통했던 군대문화가 전 사회에 확산돼 기업문화와 일상생활에도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본다.

 이렇게 보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나고 문민정치가 부활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일제식민지배와 군사독재가 우리 사회에 끼친 해독과 폐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해독과 폐단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해독과 폐단들은 생활과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우리가 우리에게’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권위를 단지 ‘서열’에서 찾는 것은 불합리하다. 사회적 권위는 ‘전문성’, ‘경험’, ‘인격’, ‘합리적 판단력’, ‘민주적 리더십’에서 나와야 한다. 나이가 좀 많다고 또는 직급이 좀 높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어린아이의 말일지라도 그 말이 옳으면 어른들이 그 말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서열의 힘’이 아니라 ‘옳은 생각(이성적 판단)’이 지배하고 이기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추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최근 어느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막걸리를 들이붓는 등’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가혹행위를 한 것이 물의를 빚었다. 이해 못할 일이다.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에서조차 폭력으로 서열을 조장하고 강요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이런 식으로 길들여진 학생들이 어떻게 ‘합리적 비판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발전은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고 변화시키는 ‘용감한 자(서열이 낮은 자)’들의 ‘합리적 비판정신’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후배가 선배를 자유롭게 넘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열이 높은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도록 ‘겁’을 먹게 만드는 사회에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합리적 비판정신을 칭찬하고 고무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 국가대표팀 히딩크 감독은 고참·신참이란 서열에 얽매이지 않는 능력 위주 선수 운용으로 4강 신화를 이뤄 냈었다. ‘히딩크 리더십’의 요체는 선수들 간의 ‘수직적 인간관계’를 ‘수평적 인간관계’로 바꾼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 당선된 국회의원들도 그 교훈을 새겨 항시 낮은 자세로 국민과 소통하기 바란다. 지체(서열) 높은 특권층이 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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