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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섭 <인천시 문화관광체육국장>
섬은, 적어도 내게는, 환상(幻想)과 환멸(幻滅)이 함께 작동하는 상징이고 기호다. 이때의 환상이 부드럽고 완만한 모래톱과 끝 모를 수평선, 그 사이에 넘실대는 파도와 거기에 몸을 맡긴 작은 고깃배 같은 천계(天界)의 것이라면, 이때의 환멸이란 떠나올 때 차츰 멀어지다가 부지불식간에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섬의 자취 꼭 그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금세 지워 버리고 마는 하계(下界)의 고단하고 따분한 인고의 섬 살이에 대한 것이다. 부딪혀오는 파도가 거칠수록 섬은 날카로운 벼랑으로 곧추선다.

이작도도 이와 다르지 않아 사나운 북풍을 등지고 섬 집들을 품어 안는다. 배가 섬의 절애(絶崖)를 에돌아 보조개 같이 폭 파인 품을 찾아들어야 비로소 섬사람들은 굴 딱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선착장에서 수줍게 외지사람을 맞는다. 오래전 섬마을선생님도 그렇게 이작에 발을 내디뎠으리.

 섬의 인정은 늘 애잔하다. 구릿빛 얼굴과 굳은살 박인 두툼한 손마디에 어울리지 않게 경계심 어린 속마음 열기가 가냘프고 약해서 애잔하고 그럼에도 그 환대가 늘 극진해서 또 애잔하다. 섬의 환대(歡待)가 늘 극진한 까닭은 내일을 기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전 섬마을선생님의 길지 않은 나날도 그렇게 경계와 환대의 그것이어서 그래서 더욱 야속한 것이었을까.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을까. 1967년 영주였던 문희는 떠나는 선생님을 향해 또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손수건을 흔들었을 터인데, 문희가 목이 메어 부여잡고 오래도록 서 있었을 작은 소나무는 아름드리가 되어 지금도 거기 있는데 그때 문희였던 영주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섬마을선생님이 기거했다던 계남분교는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 잡초만 무성한데,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엄마 대신 품어 안고 다녔던 영화 속 젖먹이는 지금 이작도 이장이 되었고, ‘사랑으로 꿈을 키우는’ 이작분교에는 오늘도 여섯 명 섬 아이들이 뛰논다.

 물 빠지면 드러나는 모래섬을 ‘풀’이라 부르는 섬사람들은 홍합을 ‘섭’이라 불렀다. 거짓말 안보태고 어른 손바닥만 한 섭이며 소라에 전복, 섬 주변 물 밑에 지천으로 깔렸다는 키조개까지 넘치도록 쪄서 내놓은 이들의 저녁 환대가 더없이 극진해서 또 애잔했다. 불콰해진 그들은 제의(祭儀)를 열었다. 이웃한 섬들, 대부도에서는 가진 체 말고 덕적도에서 아는 체 말고 자월도에선 술께나 먹는 체 말라 했다는데 이곳 이작에서는 노는 체 말란다.

 노는 것을 흥(興)이라 했다. 물었다. 이 섬의 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 비근한 뿌리의 하나는 역시 섬마을선생님이다. 수십 년 전 이 섬에 찾아들었던 한 음악가가 머물던 집 아이들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그 또래 중 몇은 뭍에서 음악을 업으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이장은 세컨드 기타에 보컬까지 자신 있어 했다. 이작도 사람들은 지금 섬마을밴드를 모의중일 지도 모른다.

 그들은 섬에 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섬은 아니었다. 공동체는 열려 있었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풀뿌리는 여전히 튼튼해보였다. 상대적인 고독과 소외는 외려 뭍사람들의 몫인 듯싶었다. 섬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섬이 되었지 싶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듯 1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큰 이작과 작은 이작 사이지만 물길은 제법 사납다고 했다. 저녁 무렵부터 스멀스멀 밀려들던 안개가 바로 눈앞에 큰 이작을 지우개로 지우는가 싶더니 금세 점령군처럼 작은 이작을 온통 휘감아 돈다. 내일 아침은 온통 사방을 덮어버릴 기세가 자못 두려운 밤, 7월의 짧고도 아쉬운 하룻밤을 못내 뒤척였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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