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농부가 장에서 칠면조 한 마리를 사 키우기 시작한다. 농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6시와 저녁 6시에 모이를 준다. 처음 칠면조는 조심스레 다가가 눈치를 보며 모이를 먹는다.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칠면조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매일 6시는 식사시간’이라는 나름대로의 법칙을 세운다. 그 후 이 법칙의 정당성은 아침·저녁으로 확인된다. 아홉 달, 열 달이 지나자 칠면조는 매일 6시가 되면 아무런 의심 없이 먼저 달려가 기다렸다 모이를 먹는다. 열한 달째 되던 날, 추수감사절이 되자 칠면조는 아침에 모이를 먹었으나 저녁에는 먹지 못한다. 농부는 저녁에 모이를 주는 대신 칠면조의 목을 칼로 내리친다. 만찬 식탁에 올리기 위해서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과거 경험에만 비추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전한지를 설명한 ‘칠면조의 역설’이다. 전형적인 ‘귀납법의 오류’를 우화화했다. 귀납법이란 이론적 틀을 먼저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이어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이다. ‘경험론’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귀납법적 오류란 ‘지금까지 그리 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을 때 발생하는 일반화의 오류인 셈이다.

 국내 정치·경제·사회·국방 전반에 만연해 있는 ‘귀납법의 오류’는 말 그대로 예고 없는 시한폭탄이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수출 주도 성장이 불가능해지면서 좀처럼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가 그렇고,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제대로 된 인간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의 개탄도 그렇다. 설마 하다가 맞닥뜨린 북한의 핵 공포 앞에서 무기력해진 국방이 그렇고, 실망을 거듭했지만 이번엔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다가 ‘역시나’ 하고 또다시 실망감을 안겨준 정치도 그렇다. 재난과 재해로 드러난 국가안전 시스템의 무능함은 더욱 그렇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모든 불행한 사태에는 전조와 징후가 있다. 정치인들은 이를 무시해 더 이상 국민을 공포와 경악에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불쾌한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재앙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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