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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건태 경제부장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인 100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앞서 미국 대선에선 누구도 예상 못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고,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실체는 연일 양파껍질 벗기듯 새롭게 드러난다. 웬만한 뉴스는 뉴스 축에 들지도 못하는 요즘, 이렇다 할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지역신문 기자는 누구 말처럼 ‘이러려고 기자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최근 지역신문 기자로서 자조(自嘲)했던 몇 가지 일례를 소개한다. 이달 초 중국 웨이하이(威海)시에 있었던 인천(IFEZ)관 개관식에서의 일이다. 인천시는 한중 FTA 지방경제협력 시범지구인 웨이하이시를 대 중국 시장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대규모 경제협력단을 파견했다. 당시 유정복 인천시장을 비롯해 이영근 인천경제청장과 지역 공기업 사장, 그리고 제갈원영 인천시의회 의장을 위시한 시의원 10여 명도 동행했다. 여기에 이강신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등 지역 기업인들도 대거 참여했다. 협력단 규모만도 족히 100여 명이 넘었다.

그러나 침체일로의 대 중국 수출시장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고 협력단을 따라나선 지역신문 기자들은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관 개관을 위한 테이프 커팅 외에 이틀간 아무런 공식 행사나 참석한 기관장 누구와의 인터뷰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장과 의장 등 책임 있는 기관장들이 기자를 피해 다닌다는 인상을 받았을 정도다. 예전 같으면 기자들을 숙소까지 불러들여 해외 공식 행사에서의 자신들 공치사를 늘어놓았을 텐데, 파국을 치닫는 국내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뭘 한들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인천경제청이 주관한 기자 만찬에 한국과 중국 기자들만 참석한 것이다. 통역과 웨이하이시 상무국 직원 2명만이 배석했다. 심각한 외교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는 배타적경제수역(EEZ)과 사드 배치 문제까지 거론됐지만 무슨 소용 있겠나 싶었다. 기자들끼리 한 말을 기자들이 전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중국시장 개척의 전초기지 운운하며 언론에 취재 협조를 요청해 놓고 도대체 뭘 보여주려 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아님 기자를 대규모 경제협력단을 꾸리는 데 구색 맞추기 정도로 여겼나 하는 불쾌감마저 들었다. 최순실의 나라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또다시 ‘이러려고 기자했나’하는 심각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참에 좀 쉬려는 요량으로 오래전 다친 발목 인대 수술을 핑계로 병가를 냈다. 생각보다 몸은 많이 망가졌고 받아야 할 검사와 병원 입원일 수도 늘었다. 그동안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미련스럽게 몸을 혹사한 탓이다. 아직 젊은 데 하며 맹신했던 건강은 여러 검사 수치가 말해 주듯 좋지 않았다.

"당장 담배부터 끊고, 술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를 더 이상 콧등으로 흘려 들을 수 없게 됐다. 병실에 누워 지난 주말 있은 민중총궐기를 지켜보면서 문득 우리 사회도 병든 지금의 내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봤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말한 숨어 있던 ‘바퀴벌레’들이 만든 난장판에 내 몸을 이렇게 망가뜨렸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이러려고 기자했나’ 하는 자괴감은 극에 달했다.

마침 기자가 입원 치료를 받은 병원은 보호자 없이 간호와 간병 서비스를 함께 받을 수 있는 통합병동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선 정해진 시간 외에 보호자 면회가 엄격히 제한된다. 환자는 오로지 간호·간병인의 판단에 따라 케어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불평·불만하지 않는다. 환자의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정성을 다하는 간호·간병인을 무한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언제가 우리 사회도 이들 ‘백의 천사’처럼 국민을 섬기는 공직자에게 감사하며, 믿고 의지할 날이 꼭 올 것이다. 지난주 광화문을 뒤덮은 100만의 함성을 청와대는 물론 이 나라 공직자들도 분명 들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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